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3. 12. 16:46 횃불/1996년

영생과 중생의 신비(2)

 

새로운 피조물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과일나무에서 난 것은 과일입니다. 채소에서 난 것은 채소입니다. 어류에서 난 것은 언제나 물고기입니다. 인간에게서 난 것은 인간입니다. 종족은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종류는 분별해 냈지만 새 종족은 창조치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 중에 하나입니다. 과실은 언제나 과실입니다. 동물은 언제나 동물입니다. 물고기가 새로 변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이곳에 새 법이 있습니다. 이곳에 새 종족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났을 때만이 새로운 성품을 부여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범죄합니까? 왜냐하면 당신의 됨됨이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담 안에 있다면 당신은 그가 한대로 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분이 하는대로 할 것입니다. 제 성이 스미스인 것은 제가 스미스 가족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걸음걸이대로 걷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며 모방하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단순히 나는 스미스 가()의 한 사람으로 그 가문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왜 개가 짖고 고양이가 울고 까마귀가 지저귑니까? 그들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합니다. 그렇다고 개가 고양이 소리를 내거나 고양이가 개처럼 짖는 것을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는 개의 종족에 태어났기 때문에 개는 짖습니다. 까마귀도 같은 이유로 울고, 고양이도 고양이이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들이 속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그들의 됨됨이를 반영입니다.

여러분은 소나 말이 일어서는 것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농촌에 계시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소는 언제나 뒷다리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나 말이 뒷다리부터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말은 언제나 앞다리부터 일어납니다. 왜 다릅니까? 그저 그것이 그들의 천성 즉 됨됨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소는 소이고, 말은 말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된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짓는 것이어서 우리가 내적인 새 성품을 받기 전에는 계속하여 죄를 지을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성품은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다르게 될 수가 없습니다. 새 탄생이란 새 성품을 의미하며 우리가 거듭나서 새 성품을 받기까지는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새 탄생의 절대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자연적 생명은 있을 곳이 없습니다. 물고기에게 주어진 생명은 물 안에서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새의 생명은 그것이 공중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하늘나라에 적합한 생명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독선적인 주장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진리를 나타냈을 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는 그곳에 맞는 성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영생이라고 말하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에 적합한 생명이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그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새 성품은 불가결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고로 만일 당신이 하늘나라에 가기 원하시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생은 현재의 경험

한 걸음 더 나가서 중생은 현재의 경험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가졌고)”(요한복음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가졌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아들이 있는 자 에게는 영생이 있고”(요한일서 5:12). 구원은 죽을 때나 혹은 죽은 후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것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생명을 죽기 전에 소유하지 못하면 영원히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은 현재의 소유 입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생명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순간적인 경험

또한 중생은 순간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탄생이란 언제나 하나의 고비이며, 영적인 탄생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하여서 일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새 생명의 탄생도 분기점에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기점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래 걸릴지 모르겠지만 거듭날 때는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입니다.

신약성경을 찾아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회심의 경우를 본다고 하면 모조리 순간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날에 삼천명의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날에 중생한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는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지만 그날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은 구원되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이었습니다. 

바울의 회심도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가던 때에는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자연적 생명 밖에는 소유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땅 위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땅에 넘어지는 동안에 혹은 넘어진 직후에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수년 후에 이에 관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날과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의 간수도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밤중에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몇분 후에 그는 구원되었던 것입니다. 해가 질 때에는 그는 육적인 생명만 가지고 있었지만 해가 다시 뜰 때 그는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였습니다. 그 하룻밤 사이에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될 길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선물을 드린다고 합시다. 그 선물을 받기 전에 그것을 가지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 당신은 그 선물을 가졌습니다. 그 선물은 반드시 나의 손에서 당신의 손으로 순간적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영생은 선물입니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받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점차적인 회심이란 알려진 일이 없었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순간적으로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당신에게는 언제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인 순간이었습니까? 그 일의 정확한 시각을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체험하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만일 있었다면 그것은 순간적이었습니다.

 

알 수 있는 경험

중생은 알 수 있는 경험입니다. “내가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

수년 전에 제가 인디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되었을 때 어떤 전도자가,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내가 몹시 외람된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당신은 그것을 모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모릅니다.”  그는 설명을 계속하였습니다.  나는 심판날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때에 가서야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 저는 놀라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곳의 인디안들에게 선교사로 나와서 그들에게 구원을 전파하십니까? 당신 자신이 신자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들에게 신자가 되라고 권면하십니까?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안받았는지 확실히 모르면서 그들에게는 구원받으라고 권고하시겠군요. 당신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그때 저는 요한일서 5:13을 알지 못한 때였습니다. 만일 알고 있었더라면 그에게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을 지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당신이 영생을 가졌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기를 바라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알 수 있다고 명백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다른 모든 것에 관하여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마는 이것 즉 중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제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고 합시다. “당신은 결혼하였습니까?” “당신은 자녀가 있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당신은 글쎄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 “아니오둘 중 하나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다른 것들에 관하여서는 다 확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만 불확실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하고도 모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확정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확신이 없다면 사망의 잠이 지난 뒤 당신이 중생하지 못하였다는 비참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 그것을 알기 위하여 고민하고 슬퍼하며 침식을 잃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알게 되리라고 방관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추호의 의심없이 당신이 영생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아십시오.

 

요한일서 5:11,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2,000여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부르짖으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구원의 일에 여러분이 관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주셨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공로를 세우거나 일을 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선물로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니라.”  여러분은 빈손으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마치 선물처럼 받아야 합니다.  만일 돈을 낸다든가 일을 해서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영생을 원한다면 그것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4:10)이라고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더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완전히 그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사업의 댓가로나 영웅적인 행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영생을 받으려고 하면 반드시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까? 그가 신발, , 목걸이, 가락지, 살진 송아지의 값을 치루어야 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구원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기에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저의 집에 제일 먼저 찾아오시는 분에게 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가정 합시다. 여러분은 그 책값을 가지고 오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저를 알고 저의 말을 신뢰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태도도 이렇게 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데 여러분은 그 선물인 구원을 공로로 얻으려고 일의 보상으로 받으려고 애쓰며, 그 무엇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여러분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여러분은 단순하고 어린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내어벌린 팔에서 구원의 선물을 받아가지 않습니까? 모든 빛은 갚아졌습니다. 완전히 갚아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오로지 이것만이 그분이 구원하시는 계획의 원리입니다. 다른 것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받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 위의 친구의 선물은 받고 하나님의 선물은 거절하시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유일의 희망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잃은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바는 여러분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구원에 대한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선물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나 도덕이나 종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음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은 영생을 그의 아들 안에 두시고 아들을 가진 자는 생명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영생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가지 질문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인가? 만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가졌다면 내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생명을 원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소유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는 순간에 생명-영생은 나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을 들어 보십시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만일 저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저는 생명이 없고, 만일 저에게 생명이 없다면 저는 죽은 것입니다. “네가 거듭 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당신은 그분을 아십니까?

 

구원이 의미하는 것

여러분은 구원이란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선한 교인이 되고, 어떤 계명을 지키며, 도덕적이고 흠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한 인격, 즉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 영생은 그 안에 있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이고 살아있는 생명으로 중생했음을 뜻한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 없이는 멸망할 그런 영생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기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체험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그것은 한 인격을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

우리는 지금 나인성의 성문 옆에 서 있습니다. 이 문 앞을 젊은 청년의 시체를 든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많은 군중이 죽은 자를 무덤까지 인도하라는 유대 법전 의식에 따라서 그 뒤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머리를 숙인 채 그들의 얼굴에는 유가족을 위한 최대의 동정의 표정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녀가 의지하던 유일한 즐거움인 사랑하는 아들의 관의 뒤를 따라가며 슬피웁니다. 

갑자기 급한 걸음으로 행렬을 가로막는 사람이 행렬을 중지하고 말하기를 , 내가 어떻게 해 보지요. 나는 이 청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행렬은 멈춰지고 군중은 이 낯선 사람이 그들을 헤치고 들어오는 것을 믿을 구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관 속으로 손을 넣어 죽은이의 몸을 만지면서 그 안에 누워 있는 청년에게 철학과 과학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반응이 없는 시체를 덧없이 쳐다볼 뿐입니다. 교육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교육을 앞선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며 사람이 교육받기 전에 우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시험하려고 생명의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은 보다 나은 환경뿐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그가 살리라고 생각하십니까?”까고 말하면서 쓰레기와 먼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모든 오물을 없애고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여 졌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죽어 있습니다. 즉 사회개혁도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야말로 성공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보 젊은이, 마음을 단단히 하시오. 당신의 의지력으로 살기로 결심하시오. 원한다면 일어날 수 있소.”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계속합니다. “, 젊은이 마음을 고치시오. 이 슬퍼하는 어머니를 봐서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지 않겠오?”

그러자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몇분 동안 움직이지 않습니다. 드디어 한 유명한 랍비가 시체 가까이 걸어옵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 이 청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교입니다. 모세오경과 탈무드를 실천하면 그는 살아납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의 관 옆에 앉습니다.

그의 팔 밑에서 사람들이 곧 알아 볼 수 있는 모세오경과 탈무드와 유대인의 법전을 각각 한권씩 관 속의 시체 옆에 다 놓았습니다. 군중들은 가까이 몰려 들어서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 봅니다.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 내가 이제 젊은이에게 율법의 670개 조항을 나타내 줄터인데, 왜냐하면 이것을 지키는 그는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것 참 그렇군하고 놀란 랍비 는 말합니다. “미처 그걸 생각 못했구 만. 참 그래, 그는 먼저 살아나야 하지. 그는 죽었어!”

물론입니다. 그가 살아나기 전에는 이 세계의 유대인의 법전이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옆의 사람이 말합니다.  슬픈 표정을 지은 이 박식한 랍비는 돌아서 나갔습니다. 그에게는 해답이 없었으며 종교도 실패했습니다. 

그럴 때 군중 속에서 이 실패만 거듭된 실망의 분위기를 헤치고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관 옆에 서자 기대에 찬 군중 속에 순간적인 적막이 흘렀습니다.  이 사람도 실패하지 않을까? 그는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아는가?

지금 그가 말문을 엽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권위가 있습니다.  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초조한 마음으로 군중들은 그 안을 보려고 둘러 쌉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내가 말하노니.” 뒤에 무슨 권능이 있는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그러나 그들의 의혹은 풀렸습니다. 죽었던 청년의 눈거풀이 움직이고 양볼에 혈기가 돌기 시작하고 심장이 뛰더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그 사람은 죽었었고, 그에게 가장 긴급하고 절실히 필요하였던 것은 바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을 알았고 그것을 주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당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죄와 허물”(에베소서 2:1)로 죽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 곧 영생입니다. 이것은 유일하고 위대한 생명 요소입니다. 교육이 못합니다. 사회개선이나 개혁이 해결책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생명을 다시 가져오게 하는데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명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자신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부여할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영생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1996 9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릇된 적용  (0) 2014.03.12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  (0) 2014.03.12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0) 2014.03.12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교회  (0) 2014.03.12
현숙한 여성  (0) 2014.03.12
발람(11)  (1) 2014.03.12
햇빛과 폭풍  (1) 2014.02.12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  (0) 2014.02.12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