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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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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4. 10:07 횃불/1997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23장 죄를 지시는 그분의 위대함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53:12).

그 존귀하신 분이 인칭대명사 I를 통하여 내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실수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며 그 상황에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묘사를 통해 자신의 종을 소개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적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종의 경력에 대한 판결을 선언하신다. 우리는 그 장이 전개됨에 따라 화자(話者)와 다른 이들의 의견이 우리(We)라는 단어로 표현됨을 목도할 것이다. 참회와 믿음에 앞서 적의, 비판, 동정 등의 문구가 나온다. 이러한 면에서 이것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세상의 태도에 대한 참된 묘사이다. 이 놀라운 이상을 깨달았던 그분의 말씀이 영원자의 판결로 우리 안에 거하기를 기대한다. 죄와 고통의 비밀은 이제 영원히 끝나고 시간도 말일까지 흘러갈 것이다.

죄를 지시는 그분에 관해 두 가지 일이 단정되어진다. 첫째, 그분은 위대한 분이어야 한다. 둘째, 그분은 새로운 학파의 창시자도 아니요 사회 개혁 운동의 지도자도 아니요 예외적으로 흠없는 성인도 아닌 단지 고난받는 자로서 명령하는 위치를 획득하여야 한다. 이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라는 대목은 그분의 고난이 자발적이며 밖으로 표출되는 양상임을 보여준다. 그분은 자신을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 받도록 허용하셨는데 이는 본성적인 면이 아니라 그들을 동정하는 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 곁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과 동일시 하는 입장에서 중보했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분에게 강한 자에게서 탈취한 것을 나눠주며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그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분 자신을 비우셨다. 비록 지금 그분이 그것을 다시 하신다 해도 죽음을 통해 그분이 취하신 그 위대함은 그분의 가장 놀라운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위한 가장 위대한 고유의 유익이 된다.

 

(1)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아버지의 놀라운 보상이 주어졌다.

거룩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자들에게 큰 그에 상응한 보상이 주어짐이 마땅하다. 여기 복종의 그 좁은 길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폭 넓게 알리고 영화롭게 하신 한 분이 계셨다. 그같이 비길데 없는 놀라운 헌신이 아무런 열매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무관심의 취급을 받은 것이 된다. 충성된 그 종이 알려지지도 않고 불명예스럽게 무덤에 누워있도록 허락되었다면, 그분의 본을 따르는 다른 열렬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보다 더 많이 더 좋게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분에게 어떠한 알아줌도 보상도 있지 않았다면 천국에는 신실한 봉사를 한 자들에게 줄 어떠한 상급도 없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분명히 그분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질서 자체가 오점으로 흐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에게 무슨 보상이 주어졌는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하셨던 그분에게 무슨 보상이 주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와 같은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유혹과 슬픔과 고통의 시련을 통과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지 아니했던가? 모든 세계는 본래 그분의 소유였고 모든 거룩한 천사들로 창조주이며 하나님이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분이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실 수 있으시겠는가?

그 해답은 우리에게 수여된 즐거움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회상하고 그 주어진 희락에 우리의 희락을 회상함에 의해 암시될 수 있다. 축복하고, 구원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 것 등이 인간의 마음에 가장 순수한 축복이 되어 우리 가슴을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과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도덕성 혹은 상황에 주어진 제약들을 제거해 보자. 가장 고상한 시간이 되며 온전한 열망을 인식해 보도록 하자. 돕고자 하는 마음에 동정심이 수반될 때 가장 민감한 마음도 상처될 수 없으며 그 지혜는 실수할 수 없으며 그 능력은 움츠려 들거나 좌절될 수 없다. 그리할 때에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신 것과 같은 그 깊고 다함이 없는 은총을 마시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총이며, 이 상급이 바로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것이다. 모든 능력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 그분이 인자이시기에 그분에게 속한 자들의 순수한 유익을 위해 그 권세를 사용하실 수 있다. 그분은 아버지 우편에 앉히우셨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그분을 거부했던 민족들을 불꽃으로 심판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예수 곧 구세주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이는 모든 이름에 뛰어나며 모두 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그분을 주라 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지금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어떠한 자일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분께 굴복하는 모든 자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건짐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 그분은 자신을 믿는 자들이 거룩한 성품의 은혜를 입어 본질적인 하나됨을 이루도록 친히 기도하셨다.

이보다 더 놀라운 보상은 없으며 구세주도 이것 아닌 다른 보상을 요구하실 수 없으셨다. 그 관대함 가운데 그것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호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희생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을 따를수록 우리는 더 깊이 그분의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분의 잔을 더 깊이 마시고 그분의 침례에 더 깊이 동참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구속하신 목적을 더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아서 순결과 의와 평화로 인간의 도성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의미이다.

바울에게 물어보라. 왜 그가 그토록 자기 몸을 제어하며 엄청나게 두들겨 맞는 고난을 감수했는가? 왜 그가 자기 만족을 그토록 부인했는가? 왜 그가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며 절제했는가? 만일 그가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따르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데에 우선했다면 그 상급을 놓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 상급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라고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정중히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는 그 위대한 권세에 놓여있는 그 가치와 매력을 그대에게 말할 것이다(고전 9:2027).

이것은 천국의 최고한 보상이다. 자신의 영혼들을 죽기까지 쏟는 모든 이들에게는 보다 확장된 봉사의 기피와 가능성들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이 그같은 기회를 자신을 해롭게 하도록 남용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대행자들이 그들의 애씀에 따라 그 풍성하고 섞이지 않은 은총을 얻게 될 것 또한 확실하다.

 

(2) 인간들 가운데 거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위대하다.

그분은 그 비밀스런 운명의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 세상의 빛이신 그분은 우리의 운명의 그림자인 그 위대한 비밀을 벗기신다

 

고통

우리가 슬프게 배웠던 것처럼 고통은 편재한다. 조만간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불같은 세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쉬이 우리 자신을 정죄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기 쉽다. “, 불꽃의 사름이 내 죄로 기억나게 하고 내 소시의 죄악을 보복받게 하나이다.” 바로 이 같은 고백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첫 인상이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무정하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께서 순진한 그의 자녀들이 이처럼 고난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분에게 공의가 없다. 나는 그를 저주하고 죽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외침이 우리의 두번째 절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에 관한 세번째 길이 있음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죄를 범치 않으셨지만 일찌기 어떠한 인생보다 더한 고난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고통이 언제나 특별한 어떤 죄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한 때 너무 깊은 고뇌 속에 잠겨 있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도덕적인 면에서 세상의 통치 기준에 실패하거나 어긋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한 두가지 암시를 제해 버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죽음은 순전히 우리들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셨고 인류를 구원하고 풍성케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류 가운데 많은 이들을 불러 그 고난의 잔을 마시도록 하시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되길 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별한 죄의식이 없는데도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입는다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오히려 언젠가 어디선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우리가 겪은 고난과 그 고통을 견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채우는 구속적인 목적을 더 한층 심화하는 것임을 인식하자. 그러한 고난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분의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부름받은 것을 의미한다.

고난으로 변형된 이것은 얼마나 무한한 가치를 지닌 봉사인가. 그들이 친히 겪은 고난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함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박해받는 이들, 정욕의 희생가들, 중풍병자, 암환자 그밖에 침상에 누워있는 각색 병자들은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과 또 다른 이들의 그같은 말못한 고통이 어둠의 압제자를 정복한 우리 주님이 당한 그 고통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대하게 여긴다. 또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은 고난을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켰다.

 

사망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따스한 햇살이 막 기어오를 때 불가피한 그림자며, 가장 기쁜 즐거움을 침묵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사망을 폐하셨고 생명을 부여하시고 불후의 빛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가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죽음을 맛보시고 천국에 다시 들어가시고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취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은 그 두려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한 가느다란 길을 내셨고 그분은 잠드신 동안 그 길을 안전하게 통과하셨다. 그분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우리에게도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죽음은 우리로 본향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류는 이런 식으로 꿈꾸며 희망했다. 여전히 아무도 몰랐다. 그들의 예측은 대서양을 횡단하기 전의 콜롬부스와 같았다. 결국 콜롬부스가 대서양을 처음 횡단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은 더 이상 추론하거나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그 사실은 모든 세대의 철학자들이 결코 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명과 영생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분을 위대하게 여기는데, 실로 그분은 죽음으로써 사망을 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분은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범죄자와는 다른 특징을 가졌는데 그분은 바로 모든 범죄자들의 죄를 지고 가셨던 것이다. 인류의 죄가 그분에게 옮겨졌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우리 모두는 죄를 가졌고 그 죄로 일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세상 죄를 지셨다. 인간의 속죄 염소(Scapegoat)로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무인지경으로 가셨는데 그 일은 결코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분은 그 나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만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었던 그 유산까지도 해결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겸손한 심령으로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즉각적이고도 풍성한 용어를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용서는 불의한 것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보장된다. 그분은 자신의 아드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모든 약속들을 신실하게 지키신다. 비록 구원받은 이후라 할지라도 자연적인 성품(육신)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존귀히 여기도록 한다. 죽으심으로 그분은 죄값을 다 치루셨고 죄를 끝내셨고 불의를 정결케 하며 영원한 의를 가져왔다.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보배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죽임을 당하셨으니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3)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를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시는 그분의 죽으심은 위대하다.

축복의 산에서가 아닌 십자가에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오직 그것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다양한 교훈들을 배운다. 거기서 그들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된다. 약속하신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그분의 공의와 진리 등이 그곳에 잘 나타나 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의 구성 요소를 구별케 해주는 하늘의 프리즘이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의 헌신된 사람을 발견케 되어 놀라게 된다. 거기에서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얻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고 그토록 겸손하게 낮아지셨다. 수세기 동안 지옥의 화산은 온 우주에 그 불꽃을 품어 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 일로 인해 사망의 세력이 깨어졌고 그 왕국이 끝장 났음을 드러내 주었다. 온 우주에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인간에게만 그 효력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혈통 그리고 자연계의 질서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그분은 마침내 지상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만물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화목케 하실 것이다.

 

(1997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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