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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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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4. 15:44 횃불/1999년

그리스도인의 과거, 현재, 미래

(에베소서 2:1-7)

H. A. 아이언사이드

어느 토요일, 나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어느 유명한 해변 휴양지까지 운행하는 차를 탔습니다. 우리가 아직 그 도시를 다 빠져 나오지도 않았을 때 붉은 무늬의 큼직한 손수건 조각들을 이어서 만든 이상한 옷차림에, 또 이마에는 번적거리는 장식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좀 특이한 차림새의 숙녀(나는 그를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여자 말씨였으니까)가 내게 다가와서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당신의 운에 대해 들어 볼 마음이 있으세요?”

당신이 내 운을 점칠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귀여운 작은 손바닥을 쭉 펴고 말했습니다.

은전으로 제 손에 십자가를 그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 드리지요.”

나는 스코틀랜드 사람입니다. 나는 은전장난 따위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잔돈도 없구요.”

그녀는 잠시 당황해 했습니다. 그러나 곧 끈질기게 말했습니다.

, 선생님. 나는 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은전 하나를 제 손 바닥에 얹으십시오.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해 주겠습니다.”

내겐 전혀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나의 운을 알고 있으니까요.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말해 주는 작은 책을 내 주머니 속에 갖고 있습니다.”

그런 책을 갖고 계시다고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대 오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읽어 드릴까요?”

나는 나의 신약성경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에베소서 2장을 펼치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과거가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녀는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를 붙들면서 말했습니다.

당신께 드릴 선물도 갖고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녀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그렇지만 아직도 더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소유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대가로 내게 은전 한 닢 주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아무런 대가 없이 당신에게 그것을 주겠습니다. 그것은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미래입니다 여기에 나의 미래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녀는 일어섰습니다. 나는 폭력이나 폭행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그녀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못된 사람에게 걸렸군! 못된 사람에게····라고 말하면서 통로를 따라 나가버렸습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신비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 얼마나 깊이 파고드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거액을 어떻게 버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생쥐만큼이나 가난한, 이러한 점장이들과 영매자들(spirit-mediums)은 모두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매우 중요한 계시에 대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 아연할 뿐입니다. 그는 우주의, 이스라엘의, 거대한 이방나라들의, 하나님의 교회의,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 개개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려주셨습니다.

너희를 살리셨도다에서 살리셨도다라는 단어는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헬라의 사고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문에서는 그 동사가 5절에서 나타나고, 그러므로 번역성경에서 부드럽게 읽어 나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 단어의 삽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살리심이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들고.”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산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지니고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자가의 상태를 증진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장한 심장의 박동이 없을 것이며, 또 당신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하여 용서를 필요로 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사람들을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필요로 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듭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도덕의 수준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그렇게 타락하고, 그렇게 부도덕하고, 그렇게 사악하고, 그렇게 비열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면, 그들도 죽습니다.

아름답고 어린 소녀, 야이로의 딸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잠깐 동안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녀에겐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사랑하는 부모의 눈에는 분명 석고상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모습으로 보이고, 또한 있을 법한 부패조차 없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죽었습니다.

누가복음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나인 성으로 오셨을 때, 사람들이 어떤 젊은이를 장사하기 위해 메고 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죽은 지 2일이나3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일반적으로 생명이 끊어진 날이나 그 다음 날에 시신을 장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젊은이는 어린 소녀보다 죽은 지 더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번에는 나사로의 무덤에 계시는 주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의 누이들은 돌을 옮기지 마시기를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형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속에서는 부패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은 바로 그 동일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야이로의 딸에게, 나인 성의 젊은이에게, 그리고 나사로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깊이 빠져 있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타락하거나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었고 그러므로 새로운 신적인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 두 가지 다른 표현의 차이점을 주목해 보십시오. 죄란 표적에서 벗나가는 것이며, 허물은 어떤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입금지’(이 경우 침입이라는 말과 본문의 허물이라는 말이 영어에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라는 표지를 보면서 그것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침입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죄에 다 해당됩니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죄인이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침범했기 때문에 침입자(우리 성경으로는 허물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아직도 우리는 그 속에서 거닐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더불어 한 걸음도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게벨라인(Gaebelein)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어느 YMCA 강당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서가 그에게 어떤 카드 한 장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그런 것을 지나쳐 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지금부터 나는 종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삶을 신실하게 살기로 서약합니다라고 쓰여져 있었고 또 사인을 할 수 있는 여백이 있었습니다. 비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게벨라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수 있겠는가? 죄인의 손에 그런 카드를 쥐어 주는 것이나 지금부터 나는 종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삶을 신실하게 살기로 서약합니다라고 말하며 거기에 사인을 하는 것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네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얻은 후에야 자네는 그것을 위한 삶을 살수 있을 거야.”

당신은 세상을 따른 삶, 도덕적인 삶,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이 세상 풍속을 좇는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세상은 도덕과 종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내를 찾고 있는 젊은이라면, 도시에서 가장 천박한 뒷골목에 가서 초라하고 누추하고 개성도 없는 소녀를 찾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젊은 여성을 찾고 있습니다. 아가씨들도 또한 그런 신랑감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덕과 종교를 반드시 기독교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그런 특성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보다는 훨씬 높은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이 세상의 품속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풍속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어떤 조그마한 희랍 철학자들의 그룹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플라톤(Platen)인간이란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나가서 수탉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내밀며, “보라 여기에 플라톤의 인간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외치기를,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눈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늘을 우러러보고 마음으로는 언제나 높이 계시는 능력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존재는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가피하게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무신론자조차도 교정할 수 없는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예배하며 스스로가 자기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풍속이란 종교적, 도덕적 풍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비열하고 지독하게 사악하고 또한 추악한 풍속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풍속이며, 우리가 거듭나기까지는 그것에 따라 행하는 풍속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물론 그는 마귀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살게 될 때, 마귀는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의 뜻에 따라 끌려 다니게 됩니다.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때때로 우리는 욕심이라는 단어를 어떤 창피스러운 죄(색욕)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불법적인 욕망입니다. 실로, 육체의 욕심만큼이나 마음의 욕심이 많습니다. 교만, 허영, 고집, 탐욕,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의 욕심이며 그것은 육체의 욕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들입니다.

로마서의 전반부 세 장에서 우리는 육체의 욕심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를 보게 되며, 그리고 고린도전서의 전반부 세 장에서는 마음의 욕심에 관한 하나님의 묘사를 보게 됩니다. 죄악되기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불결하고 사악하고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혈통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죄악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을 약속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을 이행하셨습니다.

당신의 과거 모습을 인정하십니까? 어찌면 그것이 과거의 모습이 아니고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만드시고 또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완전히 청산하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4-6절에 나타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 표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합니까?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죽었고, 소망이 없고 또 죽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옛날에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며 공허하며 하늘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23, 1:3).

이처럼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을 하십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1장에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과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살펴보았으며, 이제 여기서는 그분의 긍휼의 풍성함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긍휼에 풍성하십니다 가장 사악한 죄인을 위한 무한한 긍휼이 있습니다. 이 긍휼을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맡길 일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화목제로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모든 인류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 인류 가운데서 유대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그들은 자기 행위들로 인하여 의로워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죽은 행위였고, 또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죽은 유대인에게와 죽은 이방인들에게 그분은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가져오고 그들은 그것을 믿어 함께 살아나게 됩니다. 전에는 가운데 장벽이 있어 나뉘었던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함께라는 이단어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유대인과이방인을 나누는 장벽을 하나님께서 허무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그분은 왜 이런 방식을 택하십니까? 나의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병에 누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승리 가운데서 그분을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분과 함께 살림을 받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며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두 함께 그분을 영광스러운 머리로 삼는 하나의 복스러운 교제를 이룹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은혜란 모든 공로 개념을 배제합니다. 우리는 매우 간절하게 기도하거나, 아주 철저하게 회개하거나, 마음을 고쳐먹거나, 과거의 죄를 보상하거나, 선행을 하려고 애쓰거나 율법을 지키고 산상수훈을 순종하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은혜란 공로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어떤 성경연구모임에 매일 수많은 설교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모임의 인도자는, “만약 사람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많은 설교자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나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매달린다고 해서 구원받고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been saved). 그것은 이미 확고한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될 때, 그들은 이제 막 실제로 견습을 시작하게 되었고 또 그 과정을 충분히 잘 수행해 나가게 되면 마침내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오 주님, 마침내는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런 기도에 아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확고한 사실입니다.

누구도 한때 구원받았다가 그 후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며 새로운 생명, 즉 영생을 얻었습니다. 만약 그 생명을 잃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일시적인 생명일 뿐입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순종에 의존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만약 사람들이 당신에게 구원받고 있느냐고, 그리고 마침내 구원받게 될 것으로 믿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제가 끝까지 함께 잘해 나간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을 통해 영원히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하심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가 6절에서 읽게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가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림을 받으셨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들림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영광스런 집에 도달할 그 때일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십니다. 옛날에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그의 가습과 어깨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어서 대제사장 안에 그들 모두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해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 앞에서의 완전한 대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나는 그분과 함께 살피심을 받아 그분 안에서 하늘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저 위에 있는 나를 보십니다. 그것을 단순한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실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축복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분에 부합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어떠합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오는 세대”, 그것은 우리를 먼 길, 즉 천년왕국 너머의 먼 길로 인도합니다. 천년왕국은 오는 세대입니다. 그것은 영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입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엄청난 시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는 여러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십니다. 이 여러 세대 가운데 어느 때에 나는 그 위대한 나타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구속 받은 모든 자들을 땅 끝에서부터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수많은 죄인들에게 엄청난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모든 피조물들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영원토록 나타내기 위하여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의 신실함에 의존하고 있는 미래입니다.

 

(1999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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