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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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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5. 10:47 횃불/ 2000년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에베소서 3: 14-21)

H. A. 아이언사이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14-21).

 

이 귀한 서신에는 두 개의 기도가 들어있는데, 1장에서는 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3장에서는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첫 번째 기도를 읽고 나서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그 엄청난 규모를 보게 되고, 또 그의 미리 정하신 계획 속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 번째 기도를 읽고 그것에 대해 묵상해 보게 되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과 그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묵상하면서 이 기도의 범위를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일곱 개의 단어를 독자들이 생각해 보기를 나는 바랍니다.

14절에서 우리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비노니라는 말씀을 봅니다. “무릎을 끓고 비노니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며 또 강렬한 인상을 나타냅니다. 만약 당신이 기도나 묵상에 아주 조용히 몰두해 있다면, 내가 늘상 하는 것처럼, 혹시 당신도 성경을 펼쳐 놓고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는지, 또는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지 그것을 유의해 본적이 있는지요? 혹은 성도들과 더불어 함에 모여서 어떤 이가 기도를 인도할 때 거기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간절하거나 혹은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깊은 간구를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우리는 무릎을 끊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무엇을 인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으로 인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특권과 또 그가 말한 큰 비밀 속으로 그들이 완전히 들어가기를 그가 바라는 그의 갈망으로 인해서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아버지 앞에 무름을 끊고 비노니.” 첫 번째 기도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 두 번례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명확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때때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사용하는 것과 같이 그런 경솔한 방식이 성경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간구합니다라고 하거나 혹은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빕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거기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에게 있어서일 경우에는 큰 차이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있던 다른 사상들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나는 모든 것을 언제나 적합하도록 만드신 만물의 성자, 만물의 창조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품으로부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인간이 되도록 하신 분을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을 떠나시기 직전에 주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20:17).

우리가 보다시피, 여기에는 두 가지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모든 애정(가족 관계의 핵심인 가족의 애정)의 근원이신 아버지입니다.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끊고 비노니.”

각 족속은 분명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모든 족속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하려고 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귀한 생각을 가져다 줍니까?

각 족속(가족)”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중생한 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가족을 이루게 되고 또 그것은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것은 의미합니다. 그러나 타락한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지도 않은 수많은 천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타락했지만 구주를 찾지도 않은 천사들까지도 나는 생각해봅니다. 천사들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지만 그들은 그 가족을 시중드는 종들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구약 성도들의 가족이 있습니다. 홍수이전의 가족, 족장시대의 가족, 이스라엘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지난 세대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 은혜시대의 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곧 영광스런 나라의 가족이 될 것입니다. 각 세대 사이에는 구별이 있지만, 모든 가족은 동일한 복되신 이로부터 생명을 얻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 그를 경외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가족은 하늘과 땅에 그 거처를 정하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우리에게 대하여 죽은 자들이 하나님께는 살아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올바른 기도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의 자산이 있습니다.

그 은혜의 풍성을 따라.”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려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또 그분에게는 놀라운 자산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분께 간구하는 데에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왕을 찾아 왔고, 그가 전하,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너무 많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왕은 수많은 보화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왕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받는 사람에겐 너무 많을지 몰라도 주는 내겐 많지 않도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리라”( 3:20).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온갖 구할 수 있는 것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라고 사도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달을 달라고 기도하는 어린이들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우리를 위해 해 주신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하면서 그분께 나아가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자산이 우리에게는 주어집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 영광의 풍성함에서가 아니라, “풍성함을 따라입니다. 1장에 나오는 이와 유사한 구절들을 언급하면서 이두 가지 표현 사이의 다른 점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한 예를 다시 되풀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차이점을 참으로 알게 되면 그것은 심령에 큰 유익이 됩니다.

그 다음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할 때나 혹은 그분을 증거하려 할 때, 때때로 당신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목표에의 결핍,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당신이 성취하는 작은 일에 대해서도 포기하게 될 것처럼 느끼지 않습니까? “내가 조금만 더 강하다면 절가 달라질 텐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들어보십시오. 뛰어난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충전용건전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듣습니다

오 하나님, 더 큰 능력을 주옵소서. 능력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의하면 옛 건전지는 다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여 다른 새 것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충전용 건전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하고 영원한 동력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며 또 그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사용되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 단어는 내주하심입니다.”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이것은 사도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대해 말할 때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 못자국 난 복되신 손으로 모든 것을 지도하고 인도하시면서 우리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단순한 방문객도, 수시로 오는 손님도 아니고, 그는 살아 계시고 사랑이 넘치며 복되신 우리의 주님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다음의 짤막한 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주가 아니라면 우리의 주도 아니시리.”

그분은 두 번째 자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될 때 그는 그 첫 번째 자리에 반드시 앉으시게 됩니다.

그 다음의 것은 우리의 터전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다른 서신들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 두 용어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 학교 선생님은 비유들을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문장을 배의 비유로 시작해서 그것을 철도의 비유로 바꿔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있어서 놀랍게도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나무와 같이 뿌리가 박히고 또 거대한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이 터가 굳어졌습니다. 무엇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또 터가 세워졌습니까? 사랑 가운데서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거대한 반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 가운데 뿌리박고 있는 자는 하나님 가운데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감람나무처럼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나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자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반석, 즉 하나님 위에 세워지게 될 때, 그리고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될 때, 그의 인격은 어떻게 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가지게 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우리는 결코 그것 전부를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조금, 내가 조금,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계획을 깨달아 알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성도의 교제를 필요로 하고 서로의 신앙에 대한 조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미미하고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요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연약하고 무능한 어떤 형제에게 강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전혀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무엇에 관한 내용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 그는 무엇에 대해 말해 왔습니까? 이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리고 오는 세대에 완성될 그 은혜의 거대한 계획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교시절에 나는 어떤 입체라도 길이, 높이 그리고 두께 등의 세 가지 차원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여 기서 우리는 넓이, 길이, 높이 그리고 깊이 등의 네 가지 차원을 보게 됩니다. 당신은 이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까? 당신은 넓이, 길이, 높이 그리고 깊이의 도해를 그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옛날 일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가능한 네 차원에 대해 추리하곤 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괴상한 영적 차원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종교재판소의 감옥 문을 열었을 때 스페인 죄수의 배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지하 감옥에서 그들은 죄수의 두개골과 살과 옷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착고에 채워져 있는 발목뼈들은 그대로 거기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바위벽에는 날카로운 금속 조각으로 십자가를 새겨 놓고 그 위에는 스페인어로 높이, 그 밑에는 깊이, 한쪽 팔 방향으로는 길이, 다른 쪽 팔 방향으로는 넓이라고 새겨놓은 것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그 불쌍한 죄수는 굶어 죽어가면서도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십자가의 모습은 그 모두를(넓이, 길이, 높이, 깊이) 요약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기도합니다. 분명, 이것은 우리 지식의 확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이상한 표현입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그는 기도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어머니의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고 있는 어머니 품에 있는 귀여운 아기를 보십시오. 우리는 아기를 이리 줘 보세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우리를 쳐다보고는 어머니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습니다.”나는 당신을 몰라요. 당신이 아기들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난 몰라요. 그러나 우리 엄마가 날 사랑하는 것을 난 알아요. 난 엄마에게 갈래요라는 의미로 더 크게 울지도 모릅니다. 그 아기가 엄마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의 이유에 대해 그가 무엇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누립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어린 성도들도 구세주의 사랑을 압니다. 그리고 가장 나이 많은 성도들과 가장 성숙한 성도들도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을 보다 완전히 알기를 여전히 힘쓰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기도의 마지막 요점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요함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성경번역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 의미를 잘 드러냈지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에 그가 거하신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읽는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해변을 거닐면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조개껍질 하나를 주어서 일시적으로 물이 빠져나간 모래밭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에 파도가 밀려와서 조개껍질이 물로 가득하게 된 것을 그는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바다의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살게 될 때, 이처럼 우리는 그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게 됩니다.”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을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온갖 구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입니까? 그것도 그 한도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현재 상태로 인해 어려움을 느끼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들을 스스로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과의 관계가 이뤄지게 되면, 우리는 놀라운 응답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우리와 같이 힘없고 연약한 피조물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이 하나님의 능력!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기쁨을 찾으십니다.

 

2000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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