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4. 7. 16:05 횃불/ 2000년

부 활

한 봉 래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5-38).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일어날까?”, “그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일까?” 그러면서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얻어야 부활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지혜롭다고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내 머리로는 부활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활은 없다는 논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육의 몸이 있으므로 또한 신령한 몸이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사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실에서부터 생각이 나와야 합니다. 사실이 먼저 있고, 그 것에 근거해서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를 통해 부활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씨를 심고 식물들이 거기서 자라는 과정에서 씨는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밀알의 형체는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장래의 모양을 심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심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놀라운 다른 모양(식물)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매일 보고 있는 경이로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기이한 사실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39-44).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사람, 짐승, , 물고기는 육체가 각각 다릅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것들을 봐도 해, , 별들이 있습니다. 창조의 세계를 볼 때 우리는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대칭이 있다는 것입니다. 땅이 있으면 하늘이 있습니다. 해가 있으면 달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약한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이렇게 대칭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만물을 다양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활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대칭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활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 부활은 다양합니다. 하나의 부활만 있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5:29).

여기에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라고 해서 한꺼번에다 똑같이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과 죄인들이 동시에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의 부활이 따로 있고, 죄인의 부활이 따로 있습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고, 교회의 부활이 있으며, 7년 환난 가운데 순교한자의 부활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부활을 말합니다. 창조의 세계가 다양하듯이 부활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5,6).

여기에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첫 번째 부활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부활이 있습니다. 사망도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죽으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죽음도 다양하게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창조의 세계를 다양하게 하신 분께서 이 영적인 일들을 다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대칭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육체의 몸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이 몸을 성경은 썩을 몸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5:42). 우리 몸은 죽게 되며, 죽으면 반드시 썩게 됩니다. 그런데 이 썩을 몸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썩이지 않을 몸도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욕된 몸이지만 이 욕된 몸이 있으면 영광스러운 몸도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약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칭되는 강한 몸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칭되게 만드셨듯이 우리의 몸과 대칭되는 몸을 만들지 않으시겠냐고, 그래서 부활이 마땅히 있지 않겠느냐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신을 주시고,이 정신에 딱 맞는 육체를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시고, 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몸과 정신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모신 사람은 그 전까지 자연스럽게 여겼던 이 몸에 대하여 욕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 몸이 얼마나 천한 몸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몸도 구속 받아야 한다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생명을 순종하기에는 이 육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에 가장 합당한 몸을 주신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후 그 성령의 역사에 가장 적합한 몸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논리 입니다.

죽음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의 조건일 뿐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그 형체를 잃어버리듯이 우리의 죽음은 새로운 형체를 가져오는 중간 다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몸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약한 몸, 이 욕된 몸이 그대로 지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몸은 반드시 심어져야 합니다. 이 몸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몸을 입어야 합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세계에서 놀라운 다양성과 대칭성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하나님과 사실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16:1 -8).

여기에 몇 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껏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이었습니다. 그들은 향품을 미리 사 놓고, 주일날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의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큰 돌, 장정이라야 굴릴 수 있는 그 돌을 우리 힘없는 여자들이 어찌 굴릴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열린 무덤이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의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자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이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사실에 복종되어야 합니다.

그 여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하늘의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 16:5).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과연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음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그토록 선포되었던 예언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모든 사도들이 계속 전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눈에 보였다면 혹시 잘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육신 가운데 계셨을 때 사람들과 맺었던 동일한 관계에 있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전해진 복음에 그들의 생각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분이 안 계시지만,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진리, 이 복음에 자기의 생각을 복종시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안 계신 이유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사실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무덤에서 나와 두려워하여 도망갔습니다( 16:8). 그들이 도망갈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도망가는 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불신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사실에게 복종시키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이 여인들만 그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6:11).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6:13).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역시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분명히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전해진 말씀과 진리에 복종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불신이 있는 반면 성경은 이것과 대립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사람들의 불신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14-16)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의 생각 때문에 진리를 믿지 못하는 제자들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을 보고 내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꾸짖고 계시는 예수님, 이 은혜가 사람의 불신과 대립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불신은 얼마나 큰지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기에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어떠함 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그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이 복된 소식, 이 소식이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전해지고 있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죽었고, 그러므로 나도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은 이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죄인인 우리 때문에 죄의 형벌인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어난 사실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전 10:i).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의 논리적 과정들은 하나님 앞에 복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생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우리의 생각이 말씀 앞에 무릎을 끓고 경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2000 5월호

 

'횃불 > 200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구원(17)  (0) 2015.04.15
바울의 두 번째 기도  (0) 2015.04.15
하나님의 성전  (2) 2015.04.07
하나님의 사랑  (0) 2015.04.07
천사들(2)  (0) 2015.04.07
가인 - 타락한 인류의 표상  (0) 2015.04.07
여호수아 강해  (0) 2015.04.07
신령한 노래  (0) 2015.04.07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