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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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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5. 10:50 횃불/ 2000년

여호수아 강해(4)

(약속의 땅을 정복함)

알버트 맥쉐인 지음 / 서규송 옮김

정탐들과 라합(2:1-24)

 

이 장을 읽다 보면 몇 가지 의문점들이 떠오른다.

(1) 여호와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알고도 왜 여리고 성을 탐지하러 정탐들을 보냈을까?

(2) 38년 전에 열 명의 정탐들이 행함같이 악평을 가져와 백성들을 낙담케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왜 감수했을까?

(3) 왜 두 사람은 평판이 좋지 않은 집에 들어가 악한 여인의 덫에 걸릴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았을까?

(4) 라합은 왜 정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했을까?

(5) 왜 라합은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편을 들었을까?

질문들 중의 첫 번째를 대답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이 정탐들을 보내는 것에 마음 아파하지 않으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떠날 때 기뻐하지 않으셨음을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확신하는 때라도,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동원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선교사가 수고하기 위해 새로운 나라로 떠나려 할 때에는 그 나라의 사정들과 또한 도착했을 때 봉착하게 될 어려움들도 조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나 확신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적군의 사기를 알아냄은 어떤 공격자에게든 매우 중요한 정보의 한 부분이다. 이들이 가져오는 보고를 기다림으로써, 건너가서 공격하기를 열망하는 백성들의 참을성이 시험되었음이 분명하다. 낯선 도시로 가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적지 않은 공로이며, 노련하고 기민한 사람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정탐들이 기생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사람들에게 별나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어둑해서 그리로 갔으므로 거민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맡은 임무를 숨기고자 그처럼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건너온 사실이 발각되고야 말았다. 이스라엘 진영을 강 건너에 둔 여리고 성에는 분명 두려움과 불안이 퍼졌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으며, 침투를 염려하여 비상한 경계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성문이 닫힘으로 발각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황혼 녘에 들어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두 사람이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장소에서의 유혹도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관찰 외에도, 우리는 그들이 맡은 임무의 모든 부분에서 주권적인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는데, 항상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움직였다면,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에 대한 라합의 불순종과 정탐들의 행방에 대한 거짓말은 줄곧 신학자들을 난관에 부딪히게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발도 정당화될 수 있다며 그녀의 속임과 불순종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라합의 속임수를 미성숙한 믿음의 증거라고 보기도 하며, 미성숙한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그러한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젊은 초신자들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문제에 관한 세 번째의 견해는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하는 정직의 기준을 우리가 똑같이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라합의 배경과 그녀가 음란한 거래로 살아온 사실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양심에 거리낌이 거의 없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참으로 세상의 어떤 부분에서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취급 받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라합이 두 정탐에게 말하기 전에, 또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확신하기 전에 거짓말을 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그녀는 두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오기 전에 또 그들을 지붕 위 삼대 속에 숨기기 전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을 내쫓았거나 왕의 사자들에게 그들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라합의 행위에 대한 설명이 어떻든 간에 그 설명들은 정탐들의 안전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선을 위하여 악을 지배하시는 또 다른 실례이다.

라합이 알려준 대로 추적자들은 정탐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넘실대는 요단강 쪽으로 쫓아갔으나 넘치는 강을 건널 수 없음을 알고 추적하는 일을 포기했다.

가옥의 납작한 지붕 위에 삼대를 필치는 것은 일상의 관습이었고, 그 다발들은 아래 누운 사람들을 위한 충분한 엄호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타락한 방법으로 그 성의 남자들을 파멸시킨 그 여자는, 자신에게는 타국인인 그들을 구하기 위해 술수를 써서 그들을 멸망에서 구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녀는 믿음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 믿음의 행위가 그녀를 구원했다. 그 행위 때문에 그녀가 구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행하도록 한 믿음을 그 행위가 입증한 것이다.

정탐들은 지붕 위에 숨겨졌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잠자려고 했다는 표현에서 그들은 전혀 위협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잠들려고 했을 때 라합이 잠을 방해했다. 그녀가 올라와 자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 쏟아 놓을 동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감정들이 드러났다. 이야기하는 중에 그 땅 전체의 사기가 몹시 떨어져 있음을 밝혔다.

바로에 대한 과거의 승리, 그리고 더 최근에 시혼과 옥을 죽인 이스라엘의군대가 행한 일에 대한 소식은 그들을 아주 놀라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의 성읍에 어떤 공격도 행해지기 전에 그들은 기가 꺾이고 공격자들에게 승리를 넘겨줄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그들에게 이 소식을 가져왔든 간에, 그녀는 이 승리의 이야기가 단지 사람이 행한 결과가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동일하게 최고의 권능자이신 여호와의 위업임을 터놓고 이야기한 걸로 보아 여호와의 이름이 알려졌음에 틀림없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사람들은 주변 모두가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수 있다. 라합은 전 백성이 다가올 두려운 심판 때문에 마음이 녹았다고 믿었지만, 이는 일부만 사실이다. 두려움과 위협이 임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참된 회개의 어떤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강한 성벽과 방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격퇴시키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성의 온 거민들이 라합과 같았더라면 그들은 모두 라합과 똑같이 생명을 부지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안전에 대해 주어진 보장을 살펴보면 그녀의 관심은 부모와 가족의 범주에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멸망을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정탐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구했다. 그들이 그녀의 집에 거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그녀의 부정한 직업 때문에 자신의 부모와 떨어져 살았으나 이제 전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될 때 그들은 서로 화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돌아섬은 단지 멸망에서 구출된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온전한 변화와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었다. 후에 이스라엘 진으로 왔을 때 그녀는 살몬의 처가 되었고 다윗에 이어지고 마지막은 그리스도에 이르는 왕의 가계에 들게 되었으며,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언급되는 네 여인 다말, , 밧세바, 그리고 라합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자신들의 지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안전의 보장을 구한다. 그녀도 예외 없이 진실한 표를 요구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가 창문을 열어 정탐들을 내려 보낸 창문은 성벽 밖으로 나 있었고 성을 포위할 때 이스라엘 군대에게 잘 보였을 것이다. 거기에 라합은 붉은 줄”()을 놓았다. 어떤 이들은 이 줄이 그녀가 정탐들을 내려 보내는데 사용한 밧줄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라는 단어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이 단어가 15절의 과 관련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정탐들이 그녀에게 준 상징으로서의 줄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줄로 사용된 단어가 홍색 실로 번역된 솔로몬의 아가서(4:3)에 나오는 신부의 입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밧줄)”이라는 단어는 문맥상 적합하지 않다. 붉은 줄(밧줄)이 그녀의 창문에 늘어뜨려져 있으면 이웃의 주의를 끌었을 터이나 이 창문에 늘어뜨려져 있었다면 이는 단지 찾는 사람에게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줄이 그녀의 집을 표시하여 공격자들이 이를 알아보고서 그녀와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녀에게 맹세한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 정탐들이 라합에게 제시한 두 가지 다른 조건들이 있었다. 첫째로, 그녀는 그들이 자기를 방문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되었다. 둘째로, 안전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집안에 남아 있어야 했다.

방주의 노아처럼, 피를 뿌린 곳 뒤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가족들은 안전한 장소에 남아 있어야 했다. 위험에 대한 위협, 그리고 구원 방법은 이들 가족에게 지극히 큰 복을 가져왔다.

(1) 이는 그들이 신뢰하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을 얻게 했다.

(2) 그것은 두려움에서 그들을 구했다.

(3) 라합의 부정한 생활방식 때문에 가족들이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한 지붕 아래로 그들을 모았다. 정탐들이 떠나기 전에 라합은 그들의 안전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이 생명을 잃게 된다면 이는 그들과 민족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녀에게 한 약속도 모두 무효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산으로 피해 3일 동안을 숨어서 머물라고 말함으로, 그녀는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정탐들은 여호수아에게 좋은 소식을보고하고자 분명히 서둘렀을 터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들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했겠지만, 그래도 곤란하게 되는 것보다 안전한 것이 나았으므로 모두 기다려야 했다.

정탐들은 돌아와 그 굉장한 소식을 매우 확신에 찬 말로 백성들에게 전했다. 그들은 그 땅이 절망 가운데서 간담이 녹았으며 이미 그 땅을 차지하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고 담대한 진술을 하였다.

 

이 장은 모형으로 나타난 것들이 매우 많아서 혹자는 그런 관점에서 이 장을 살피고자 하겠지만, 본서의 목적은 그런 측면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으며, 다만 이로부터 성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우고자 한다.

어떤 면에서 여호수아라는 인물은 정탐들을 보낸 것을 빼고는 이 멋진 이야기에서 한 일이 없다. 오히려 이 장에서 참된 인도자는 훈련을 돕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을 맡겨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너무나 자주 사람들은 중요한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하려고 힘쓰고 있으며, 특히 숙련과 능력이 필요할 때는 거의 모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호수아는 자기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자격 있는 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는데, 이는 그가 이미 이 일을 맡았었고 이 일에 자신이 적임자라고 입증하였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만큼 매우 지혜로웠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싸움터에서 그들로 경험을 쌓도록 했다.

오늘날 참된 인도자의 또 다른 특징이 여호수아서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또한 모든 감독자 가운데서 이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특별한 직무를 행하는데 적합한 사람들을 선별하며 격려하기 위하여 충분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탐들은 비록 젊고 이런 정찰 임무에 경험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완수할 만큼 지혜롭고 적격자라고 여호수아가 판정하였다. 적임자가 아닌데도 모임 가운데서 그들에게 사역을 담당하라고 장로들이 격려하는 일은 슬픈 일 일뿐만 아니라 비참하기까지 하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기대에 어긋나서 실망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가졌다는 암시가 이 구절들 가운데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목격하며 그분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경험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일지 모르나, 그것은 그들의 인도자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신약의 원형이신 주님께서 친히 또한 그의 사자들을 둘씩 보내셨고, 그분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광스러운 보고를 기뻐 받으시는 즐거움을 누리셨다.

여호수아가 기뻐하며 사뭇 만족하여 돌아온 정탐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과 정말로 똑같이, 또한 모임의 장로들도 그들이 격려하여 싸움터에 보냈던 전도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소식을 듣고 있다.

실제로 정탐들은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수행했는데, 그들은 그 성과 거민들을 정탐했으며 사기가 아주 저조한 사실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알기에 이른 한 이방인을 얻기까지 하였다.

라합은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멸망에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때 두려워했던 민족과 하나가 되었으며, 자신의 국적을 버리고 그 이스라엘과 함께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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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