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4. 15. 10:54 횃불/ 2000년

하나님의 은혜

한 봉 래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l0)

 

이 말씀은 하나님에 관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3).

둘째,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죄인 된 너희를 용서하노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2:4).

셋째,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영광스럽게 하노라”( 2:4).

내가 너희를 심판하노라”, “내가 너희를 구원하노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영광스럽게 하노라.”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이 하신 영광스런 일입니다.

 

죽었던 너희를····

성경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선악과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17).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도 그 즉시 죽지 아니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죽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아담의 삶을 성경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이 아담의 삶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글을 보지만 전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하여 듣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뜨거움도, 감동도, 눈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냉담하고,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하나님께 나가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성경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사는지 모르는 인생, 목적이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런 인생을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 90).

 

허물과 죄”, “불순종의 아들들”, “욕심을 따라 지내며····

여기에서 허물과 죄’, ‘불순종과 욕심과는 서로 대응되고 있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허물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원을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우리는 이 시대가 좋다고 하는 가치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 시대는 좋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정신의 배후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와 같은 사람들의 허물과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피할 수 없으며, 빠져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10:31).

 

그러나 하나님이····

에베소서 2 1-3절까지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4절에 한글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 성경은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와 완전히 대조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라는 표현이 없다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다른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은 이 사람의 상태와 너무나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반대되는 하나님, 사람과 달리 위대하신 하나님이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죽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이 이 죄인들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셔야 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족하게 여기셔서 그 만족의 표시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과 함께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한 우리도 살리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 거듭난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함께 일으키사·····

일으키심살리심보다 더 진전된 형태입니다. 즉 새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생명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아들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새 생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땅 가운데 나타내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또한 우리는 이 땅 가운데 살지만 하늘에 앉아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영원한 나라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소망 가운데 확신하며 삽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아 계속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을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위치에 두셨음을 의미합니다. 사단이 건드릴 수 없는 영원히 안전한 나라로 높여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하나님이 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십니까? 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혜를 나타내는데 한 세대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살았던 그 시대,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던 그 시대는 참으로 은혜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풍성하셔서 그 한 세대를 통하여 다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를 연장하십니다. 이제 그 은혜가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2000년이 흐르도록···· 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교회 시대가 끝나면 또 다른 시대로 넘어갑니다. 7년 환난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세대가 다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여러 세대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고난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온전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13:12). 영광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던 것과,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사람에게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셨던 것 등 예수님의 모든 고난이 순종함을 배우시기 위함입니다. 불순종의, 진노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순종을 배우시고, 우리의 구주로서 온전케 되셨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그리하십니다.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면서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성도 안에 계시면서 그가 합당치 않은 일을 할 때에 그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8:26). 그래서 너희는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심지어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 안에서 소멸되실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또한 나아가서는 성령을 훼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분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고 계신지요.

하물며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서 고난을 당해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탄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인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7).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3).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의 하나라는 것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은혜의 축복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냐? 내가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마치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불 난 집에 어떤 사람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 때 소방관이 그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방관을 붙잡고 불타는 집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가 빠져 나온 후에, ‘개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서 빠져 나온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민 손에 어떤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빠져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방관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는 불에서 탈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내민 손과 같습니다. 사람의 믿음에 구원의 공로가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필수적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나 또한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구원,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이 만들어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듯이 영적인 생명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목적도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사람이 구원받은 이유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미리, 우리가 구원받기도 전에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예비하심 가운데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상황 가운데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 왔으며, 주로 말미암으며, 주께 돌아가나이다”( 11:36).

주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이는 당신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5:12-16).

어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 받는 장면입니다.

문둥병은 육체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즉 어떤 사람을 사회적인 삶에서 분리해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병입니다. 그의 죽음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건강한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부정하므로 따로 떨어져 나와 혼자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께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입니다(대하 26:16-21).

여기 나와 있는 문둥병자도 육체적으로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하나님께도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둥병은 이제 온 몸에 말기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는 죄인일 뿐 아니라 절망적인 죄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할 방법도 없는 그런 죄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나를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를 깨끗케 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정결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깨끗케 되는 것은 죄에서 구원받는 것,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죄를 사해주십시오하는 기도는 누구든지 언제나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이나 조건 가운데서도 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앞에 이러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늘 복잡합니다. 늘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갖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소망과 신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께 나가면서도 자기의 마음속에 불안함이 있습니다. ‘정말 들어 주실까?’

예수님은 그의 말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손을 내밀어 대셨다는 것은 단지 병을 고치기 위한 조치라든지 예수님의 능력을 그에게 역사하도록 닿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 문둥병자를 만지고 계신 이 장면에서 우리들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온 세상의 죄를 자기 몸에 젊어지기 위해서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문둥병자를 손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은혜의 팔로 온 인류를 껴안고 계십니다. 우리 같이 절망적인 죄인을 껴안고, 우리가 맞아야 하는 채찍을 대신 맞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5).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과 구별됩니다. 거룩하게 성별 됩니다. 이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문둥병자가 병이 나으면 제일 먼저 제사장에게 가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병이 확실히 나았는지를 살핀 후,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로 하여금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줍니다. 이것이 구약의 규정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병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선언할 수 있고, 병이 낫지 않았으면 부정하다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만 있을 뿐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신 이유는 부정한 사람을 깨끗케 하시는 분, 제사장 보다 크신 분, 제사장에게 이 임무를 부여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제사장이 문둥병자를 위한 것보다 문둥병자가 제사장을 위한 측면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4:1,2).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14:14).

문둥병 환자가 정결케 되면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그의 귀와 손과 발에 바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행해지는 의식과 동일합니다.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8:24). 이 의식에서도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릅니다. 이것은 문둥병자인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때,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됨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는 것일까요?

이제 새 생명을 가진 사람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처럼 이제 그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손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시고 행하도록 하신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우선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발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즉 지성소까지 이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뿌려진 피를 의지하여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이 놀라운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2000 6월호

 

'횃불 > 200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구원(18)  (0) 2015.04.15
부르심에 합당한 삶  (0) 2015.04.15
나비와 신생  (0) 2015.04.15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0) 2015.04.15
천사들(Angels) (3)  (0) 2015.04.15
가인 - 거짓 교회의 표상  (0) 2015.04.15
여호수아 강해(4)  (0) 2015.04.15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깃발  (0) 2015.04.15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