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4. 15. 10:55 횃불/ 2000년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에베소서 4:1-6)

H. A. 아이언사이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장과 3장 사이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의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실천적인 부분에 관해서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은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이 방향으로 인도하는지를 유의해 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게 될 때는 언제나 내가 명령하노라내가 권하노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자기의 믿음을 내세우려는 사도의 모습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행위를 엄하게 지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은혜롭고 친절하게 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가 기록되던 처음 상황 속에서 그것을 읽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감동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성도들은 그를 통하여 구세주의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말씀 증거자와 그의 사역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관계에 들어가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은 매우 가깝게 묶여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도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로마의 옥중에 있다는 것과 또한 그가 거기 있게 된 것은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복음을 너무나 신실하게 증거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으며 또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를 권면하면서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 대한 부르심은 우리에 대한 소명입니다. 바울은 앞장들에서 이미 말해 왔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 생명이 얼마나 축복된 지에 대해 앞에서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머리에 속하는 하나의 지체이며 또한 그들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처소로 함께 지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구속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또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도록 내가 그 성전을 이루는 하나의 산 돌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게 되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구절은 내 마음을 울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속의 모든 표현들이 내게 도전이 되어 나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준에 나는 어느 정도 도달하고 있는가?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거룩한 기준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거기에 어느 정도 이르고 있는가?”

영어와 헬라어 성경 원본에 나타나는 그 모든 표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볼수록, 나는 때때로(사실 항상 그렇지만) 우리들이 살아온 모습이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게 되고 더욱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모든 표현은 중요합니다.

모든 겸손과이 말은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단 한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빌립보서 2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원문에서 이 단어는 자기 주장(타락한 피조물인 우리들의 특징인)의 철저한 결여를 뜻하는 겸양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미숙함과 무지를 자랑합니다. 어떤 감리교의 회합에서 어느 젊은 목사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육은 반대합니다. 나는 교육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습니다. 나는 문학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주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사용하십니다. 나는 학교나 대학이나 교육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어떤 연로한 설교자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젊은 형제께서 자신의 무식을 자랑한다고 내가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바로 그것을 우리는 자랑합니다.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학식이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합니다.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부모들이 배워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자랑하려는 본성의 성향을 억제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이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겸손하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온유라는 단어는 신약에 여덟 번 나타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다 다루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서 친히 이것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 10:1).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29).

온유에 대한 원어의 어근은 전혀 성을 내지 않는 마음”, 즉 진정한 겸손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 무엇인가 나쁜 말을 하면 순간적으로 나는 화를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너는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온유하게 참으셨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8:48).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벧전 2:23). 이것이 온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어는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좋아하는 단어이며 또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도 그것이 두 번 사용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열 두 번 나타납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평온한 자세로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오래 참음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가 내게 대해 말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야 어떻게 참겠습니까?” 그래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육신입니다. 그것은 새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옛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나는 죠지(Gerorge)라는 조그맣고 이상한 독일 친구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는 발끈 성을 내고 냉정을 잃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조용히 쳐다보며 옛날 표지가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새 죠지가 말하는 것이냐?”고 말하면 그는 언제나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습니다. 그가 간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발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의 죠지입니다. 새로운 죠지는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옛날의 죠지를 죽여야 하고 그에게 형벌을 가해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행동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그렇습니다. 옛 성품은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면 범죄하기 쉽고 화내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새 성품은 온유하게 고개를 숙이며 파도와 물결이 지나가도 그것으로 인해 요동되지 않는다.

여기에 나오는 마지막 단어는 용납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단어가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단 한번 나타나는데, 골로새서 3:3이 그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이내용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보게 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용남은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번역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나의 개인적인 번역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나의 개인적인 번역은 이렇습니다. “모든 겸양과 겸손 그리고 평온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쾌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참고 견뎌라.”

이것이 본문의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묵상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모든 내용을 생각할 때, 우리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게 되고 우리가 범한 수많은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에 우리를 내어 맡겨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도록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도는 계속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가 아님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몸의 하나됨을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돌보십니다. 그분은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묶음으로 묶으시고 그 안에 그분의 복되신 성령이 거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서로에게와 하늘에 계신 복되신 머리에게 연결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리스도와 몸은 여러 다른 종파와 교파로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카톨릭의 모든 종파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리고 나서 개신교의 모든 종파들을 함께 모아 하나의 큰 교회로 연합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겠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도 포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이 이 모든 종파들과 교파들을 함께 모은 후에도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바깥에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몸인 교회와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몸이라고 부르는 교회는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에 의해 회개하고 중생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또 그들은 성령의 세례에 의해 영광 중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계의 모든 분열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분명 그들은 성령의 하나됨을 부인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하나됨을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은 우리를 그분이 만드신 몸에게로 연합시키십니다. 우리가 동료 신자들을 만나게 될 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킵니까? 또 나는 그들에게 속했고 그들은 내게 속했다고 인식합니까?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그들은 당신에게 속했고 당신은 그들에게 속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매는 줄 안에서 그렇게 하게 됩니다.

몇 년 전 나는 미네소타 주에서 열린 연속 집회 증에 병에 걸렀습니다. 어느 주일 정오, 네 번째의 강의 후에 나는 식사를 하러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식사 직후 나는 쓰러졌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고열과 장티푸스로 앓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섯 주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내가 집으로 갈만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역까지 가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부축해 주었고 또 역원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그는 간이 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서는 나를 거기에 온종일 누워 있게 했습니다.

여러 개의 베개를 밑에 깔고 누워 있던 첫째 날 아침, 나는 성경을 펴고서 그 날 아침의 분량을 읽으려 했습니다. 물론 당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읽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않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했을 때, 좀 뚱뚱해 보이는 어떤 독일숙녀가 내 곁을 지나가다가 멈추고서는 무엇을 읽습니까? 성경이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침 경건의 시간을 당신 혼자서만 갖습니까? 기다리세요. 제 성경책을 가지고 올테니 같이 나누도록 하시지요.”그녀는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를 읽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잠시 후 어떤 키가 큰 신사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성경을 읽으시는군요. 나도 성경책을 가지고 와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 사람이었는데, 성경책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나는 놀랐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렇게 했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동안 우리는 줄곧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가 성경을 펼치면 그들이 오기 시작했고 또 때로는 성경책이 28권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차장은 모든 객차를 다 돌면서 몇 호차에서 수양회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을 초대합니다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찬송으로 시작하여 매우 오랜 시간 모임을 갖기도 했고, 때로는 간단한 기도를, 어떤 때는 오직 성경 읽기만을, 그리고 질문들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크라멘토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거기서 몇 대의 객차가 나뉘어져서 계곡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객차의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고 그 독일 자매도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것은 줄곧 마치 수양회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만족시켰습니다. 나는 툴록으로 가려고 합니다. 어느 교파에 속한 분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나는 다윗과 같은 교파에 속해 있습니다.”

뭐라고요. 다윗이 어느 교파인지 모겠는데요.”

다윗이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119:63)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 참 아름다운 교회에 속하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 물어봤다면, 우리는 수많은 교파에 속해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복되게도, 우리 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였습니다. 논쟁이나 다툼이 아니라, 우리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모두 함께 추구하려 할 때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세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 에게 일곱 번의 하나됨을 제시합니다. 다음을 주목해 보십시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일곱 개의 하나됨은 모두 하나 속으로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위대한 고백, 그러면서도 점점 더 커지는 세 가지의 뚜렷한 영역들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4절은 매우 중요한 하나됨, “몸이 하나이요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또 말씀과 성령으로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로만 구성되어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는 성령이 하나이니인데, 이것은 한 분 성령의 사역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13에서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증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몸, 한 성령그리고 또 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모든 신자들은 다같이 복된 소망,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될 소망, 그리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다 여기에(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영역은 조금 더 넓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중생한 자들만을 포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것은 아닐지라도 신망을 고백한자들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우리가 알다시피, 중생하지 않았으면서도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심판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7:22,23).

예를 들어, 사람들이 편지를 쓸 때, 맨 마지막에 뭐라고 씁니까? 그들은 2000년이라고 씁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오신지 2000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사기꾼이나 폭력배들도 편지나 서류에 그렇게 쓸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6:46).

기독교계 안에는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이미 성도가 되도록 구원받았다는 믿음, 즉 교회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포되도록 주어졌다는 것은 진리의 한 표준입니다. 사도들이 그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예수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리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외적인 표현인 세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례는 물세례인가 아니면 성령 세례입니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세례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곱 가지의 하나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그러므로 여기서 성령에 관해 되풀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령세례라면, 우리는 단지 여섯 가지의 하나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그가 거듭났음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표지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그분을 마음속으로 모시지를 못했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우리 중의 어떤 사람은 보다 넓은 그룹에 속해 있지만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첫 번째 그룹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이든 아니든 간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 번째의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고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있고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나는 땅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알고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구주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원히 여기에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에 대해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다른 것보다 훨씬 넓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온 세상의 관계를 포괄합니다.

한 하나님.”

그분은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도다. “

이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아버지 됨이나 인간의 보편적 형제됨 등과 같은 현대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분은 특별한 인격이십니다. 이것은 범신론이나 어떤 원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은혜 가운데서 내재하시는 신적인 인격이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 신적인 인격,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에 충만히 거하시고, 만유 위에 뛰어나시고 그것을 지배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만유가운데”(우리 모두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체 세상을 대하시는 자세와 거듭난 자들을 대하시는 자세(우리 모두들 가운데)의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그분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이며,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입니까! 그분은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 속에서 일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길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시작한 권고로 되돌아야 마땅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000 6월호

 

'횃불 > 200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 강해(5)  (0) 2015.04.15
끝까지...  (0) 2015.04.15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0) 2015.04.15
영원한 구원(18)  (0) 2015.04.15
나비와 신생  (0) 2015.04.15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0) 2015.04.15
하나님의 은혜  (0) 2015.04.15
천사들(Angels) (3)  (0) 2015.04.15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