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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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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5. 10:56 횃불/ 2000년

영원한 구원(18)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성경구절들(4)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13)

마태복음 10:22과 마가복음 13:13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기 견디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구원을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견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놓치게 된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견디는 자라는 의미가 무엇이며 또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일이 견딤으로달성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게네즈 우스트(K. Wuest)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견뎌야 한다는 말은 대환난 때의 고난을 견뎌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끝까지라는 말의 의미도 이 대환난 때와 연관된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구원은 영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육체적인 의미의 구원으로서 천년 왕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을 받은 자들이 이 무서운 대환난 때의 고난을 견디어 육체적인 안녕과 방위를 도모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참고 견딤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뉴 스코필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핍박을 견디는 신자의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구출된다는 의미이다.”이와 같은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하신 영원한 속죄나 영원한 구원을 혼돈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8:32-35)

전후관계를 정확히 하기 위해 마태복음 18:21-35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말씀도 역시 율법 아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종은 그 빚을 다 갚도록(다 갚기까지)” 옥졸들에게 붙였다고만 말씀되어 있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는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므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을 섬길 때 우리는 종(그런 의미에서만 종이 될 수 있습니다)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서의 용서의 원리는 다음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2).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시지만 그것은 영원히 정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그분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고전 11:3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2:11-13)

이 말씀은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배설한 임금에 관한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22:1-14). 여기에서 혼인 잔치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아니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말씀은 혼인잔치, 즉 주님의 나라에서 내어 던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나라가 시작될 때 구원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구별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13:41,49,3:12).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들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25:10-12)

마태복음 25:1-13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에서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 다섯 처녀들은 구원을 다시 놓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 처녀들에게 주님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그리스도(신랑)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천년왕국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예비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

또한 주님께서는 저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신령하지 못한 신자라도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5:3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적인 비유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25:14-30).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이 나라는 빛과 축복의 장소입니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는 말은 주님의 나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망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마태복음 22:11-13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라는 말은 항상 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악한 왕까지도 하나님의 종이라 불렸습니다( 25:9, 27:6, 43:10, 44:28, 45:1).

이 비유에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 종은 주님 재림 때 이 땅 위에 있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여기 이 말씀에서도 너희 구원에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말한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굳센 데서라는 말은 헬라 성경에 오직 이 구절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써 그 의미는 굳센 상태혹은 굳센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굳센 정신은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 말씀은 그 전후관계를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혹은 퇴보하는 상태에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의 말씀에서 구원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말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15:1-6).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점은 이러한 비유의 말씀에 본래의 뜻을 넘어서서 너무 지나치게 확대시키기 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거한다라는 말이 그리스도에게 사용될 때는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교제를 끊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교제가 끊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아니하는 자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며( 3:15,16,36, 5:24, 6:47, 10:28, 요일 5:11-13),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28). 이 비유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고 있지 못하는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생활이 주님과의 교제를 끊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들의 증거는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동시에 그러한 증거들은 사람들로부터 배격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고 그 포도나무를 가꾸는 사람의 손길과 청결케 함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징계와 청결케 하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제자들에게 주님 자신과의 친밀한 교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2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제해 버리시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들어올리다, 쳐들다, 땅에서 쳐들다, 집어 올리다, 높이다는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해 버리다라는 말은 그 구절의 전후 관계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이 사용된 예를 다음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침상을 쳐들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9:6, 2:3,9,11,12, 5:24,25, 5:8-12).

돌을 들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8:59, 11:39).

십자가를 집어 올렸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6:24, 27:32, 8:34, 10:21, 15:21).

고기를 들어올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7:27).

멍에를 들어올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1:29).

음식 바구니를 들어올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4:20, 15:37, 6:43, 8:8,19,20).

뱀을 집어 올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6:18).

시체를 들어올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4:12, 6:29, 19:38).

그러나 특히 다음 구절들에서는 이 말을 들어올린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소리를 높인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7:13, 4:24).

눈을 들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1:41).

손을 들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 10:5).

그러므로 이 말이 들어올리다혹은 높이다라는 말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경우는 그 구절의 전후관계를 통하여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8:12).”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22:13).”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24:39).

요한복음 15:2 말씀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들어올리시고라고 번역하는 편이 낫습니다. 여기에서 가지를 잘라 던져버린다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미는 가지를 들어올린다는 의미로써 땅에 늘어진 가지를 들어올려 햇빛을 더욱 잘 받게 해주므로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한다는 의미가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무릇 과실을 맺는 가치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여기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말은 더럽고 불결한 데서 깨끗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서 10:2에서 섬기는 자들이... 정결케 되어라는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섬기는 자들은 제사를 드림으로 정결케 되었던 것입니다.

A. W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깨끗케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팔레스타인의 포도밭에 대한 지식을 조금만 있다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깨끗케 하다는 말은 식물에 달라붙어 해를 입히는 곤충이나 벌레를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농부(하나님)가 이 가지들을 깨끗케 하는데 사용하는 물은 3절에서 나타난바 대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뜻은 포도나무에서 그 가지로 통하는 생명과 영양분을 차단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거시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깨끗케 한다는 말은 신자와 하늘나라에 연관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합니다(신자와 하늘나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건을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 그 순간에 이미 전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케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 말입니다

4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일을 끊이지 않고 계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교제를 계속하는 사랑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입니다”(5).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즉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를 지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것입니다(6). 이것은 그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비유의 말씀에서 언급된 것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관계가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6절 하반절 말씀에 관하여 A. W.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사르느니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첫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복수대명사입니다. 사람이 그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이것들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하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만약 불신자를 가리키거나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켰다면 이것들이라 하지 않고 그들이라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갑자기 이것들이라는 복수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치밀함에 대하여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라는 복수대명사는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질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질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들은 곧 죽은 행실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람의 죽은 행실들이 어떻게 된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3: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공력(죽은 행실들)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고전 3:15). 여기에 나타난 불타면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5:6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롯의 경우에서 이에 적절한 실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롯은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일을 떠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롯의 죽은 행위(공력)들은 모두 소돔에서 불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 자신만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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