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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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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5. 10:59 횃불/ 2000년

여호수아 강해(5)

(약속의 땅을 정복함)

알버트 맥쉐인 지음/ 서규송 옮김

요단강을 건넘(3:1-17)

40년의 기간이 지난 후, 민족을 이루어 애굽을 떠난 이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품어왔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이 왔는데, 그 민족의 마음속에 제일 크게 자리잡은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약속이었다. 약속이 이루어질 소망이 희미할 때도 있었다.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합당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데스바네아에서의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불신은 호된 값을 치렀고, 38년이 허비되었으며, 그러한 기대가 실현될 수도 있었는데 패역한 세대는 광야에 묻혔다. 아마도 강을 건넌 사람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태어났으며 가정의 안락함, 과일 나무, 땅의 경작이나 정착생활의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혼과 옥의 왕국을 점령한 뒤에는 약간의 정상적인 생활을 경험하였으나 이것도 주로 양이나 소를 기르는 지역에서 그랬다. 우리는 이 새로운 모험이 그들 앞에 전개될 때, 그들 모두의 가슴을 부풀게 했을 흥분과 놀라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홍해를 건넌 이래로 그토록 정장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요단강 제방에 가깝게 이동해 진을 쳐야 했는데, 이것은 가파른 절벽을 내려가야 함을 뜻한다. 침수된 강은 그들에게 거의 건널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왜 이렇게 부적당한 때에 강을 건너야 하는지 의아해 했음이 분명하다. 강물이 줄었을 때는 천천히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물살이 셀 때 강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자는 그렇다면 정탐들은 어떻게 건넜을까?’라고 물을지 모른다. 그들은 젊은이들이어서 손쉽게 헤엄쳐 건널 수 있었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시간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던 수천 수만의 여자들과 어린이들에게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조건이 가장 어려울 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건너가라고 허락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가나안 백성들은 언제 공격이 시작될까 불안해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넘치는 강물은 그들로 하여금 수비를 느슨하게 하도록 했을 것인데, 이는 강물이 넘치고 있는 한 그들은 두려워할 위험이 없다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애물을 극복하심으로써 갑자기 그들을 치셨음에 틀림없다.

중요한 일이 맡겨졌을 때, 특히 그것이 여호와를 위해서 행해진다면 그분의 종들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일찍 일어남이 관례이다.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닌데, 여호수아는 일찍이 일어나 유사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진중으로 다니며 그들이 행해야 할 일을 알리게끔 했다. 1 10절에 언급된 유사라는 칭호가 기록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왔다고 하지만 서기관의 역할보다 많은 일을 한 것처럼 보이며, 여기서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도 그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분명 그들은 인구 조사에 정통해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가르침에 관한 상세한 훈령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3일은 1장에 언급된 것과 동일한 것이며 삽입된 것은 1장에 언급된 것보다 앞서 생겼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언약궤는 백성들이 목도할 기사(奇事)가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고 여리고 성을 취할 때 언약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실은 분명 매우 중요하다. 홍해를 건널 때 자기의 지팡이를 사용한 모세와는 다르게 여호수아는 여기서 어떤 기적도 직접 베풀도록 허락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훈령들을 백성들에게 내리기만 했다. 보통의 경우에 언약궤는 고라의 아들들이 옮겼으나 기적적인 일이 언약궤에 의해 생길 때는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어깨에 메었다. 모든 제사장들은 레위의 아들들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레위의 아들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제사장은 아니다.

언약궤는 선도자일 뿐만 아니라 행군하는 대군의 안내자로서 옮겨져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잘 보게 하기 위해 백성들과 언약궤는 반 마일 거리로 멀어져야 했다.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구름 기둥은 안내를 의미했지만, 이것은 단지 사막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도움은 이제 명백히 사라졌다. 길을 인도하는 새로운 방법은 그들이 곧 밟게 될 행로와 보조를 같이 하며, 그것은 그들이 전에는 결코 밟지 못했던 길이었다. 여호와께서 어떤 방법으로 교통하며 여호수아에게 훈령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호수아가 궁리하여 백성들에게 말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홍해가 갈라짐으로 모세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처럼, 요단강이 열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도자를 인정하심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겼다. 여호수아가 강물을 직접 멈추게 하지 않고, 그것에 관해 지침을 내렸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 자기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종을 영예롭게 하셨다. 이 경험으로 그들은 두 지도자 사이의 유사성을 분별할 수 없었다. 그가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일어나리라고 의심 없이 행동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며, 그가 앞으로 일어날 기적에 대해 계시를 받았다고 백성들을 확신시켰다. 그는 준비되어 있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 그것이 일어날지도 알았다.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말했다(3:5).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친히 능력을 나타내려 하신다면 그들이 자신들을 성결케 해야 함은 마땅하고 필요하다. 이는 모든 부정(不淨)이 정화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유월절 당시에 누룩이 집에서 제거되어야 했던 것처럼, 이 당시에도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에 그 임재로 함께 복을 받는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요구하신 바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 볼 수 있도록 언약궤는 넘쳐흐르는 강의 가장자리로 옮겨졌으며, 몇 마일 떨어진 상류에 물의 흐름이 멈추고 물벽이 되어 쌓이므로 흐르던 물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쳤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계속하는데, 굉장히 큰 사태나 지진 때문에 강에 둑이 생겼다는 안을 내놓으며 이러한 소식들을 여호수아가 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씀 가운데는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제사장들의 발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 정확히 기록하려고 한 것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물에 처음 닿았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고, 혹자는 보통 강바닥의 얕은 곳에 서 있었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강 가운데로 나아가 물이 가장 깊었던 곳에 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놓여 있던 돌들은 흐르던 물에 휩쓸려 사라졌으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마도 세 번째 의견이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만약에 그 돌들이 매우 크고 서로 무리 지어 있었다면 그것들은 물살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돌들의 크기에 달려 있다.

어느 때도 그런 단시간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역사적인 강을 건너지 않았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양떼와 소떼도 함께 갔으며 무거운 성막 부속품을 실은 짐차도 함께 했다. 강 중앙에 있는 언약궤를 보고서 모두들 마음의 위로를 받았으며 군대와 함께 모두가 무사할 것이라고 안심했다. 물이 되돌아오면 물이 언약궤를 휩쓸었겠지만, 백성들은 그것이 있는 한 안전했다. 홍해를 건넌 후 노래한 것과는 달리 요단강을 건넌 후 노래는 부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에 처음으로 첫 발을 내딛고서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홍해를 건널 때는 적이 뒤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적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들이 처음 들어갔던 사막에는 점령할 도시도 없었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갈 성벽도 없었지만, 이제 거대한 장애물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장에서 영적인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의 모형을 요단강 가운데 서 있는 언약궤에서 본다. 거기에서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로 서 계시며, 동시에 심판의 물결이 우리를 결코 집어삼키지 못하리라는 우리의 보장으로 서 계신다. 제사장들은 단지 발만이 요단강의 차가운 물을 느꼈지만,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넘쳐흘러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깊은 물을 감당하셨다. 모형적으로 언약궤가 사망을 의미하는 요단의 물을 정복한 것처럼, 그분은 장한 대적 곧 마귀를 이기시고, 사망의 능력을 가진 자를 멸망시키셨다. 말하자면 홍해를 건너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 대해 죽었고, 요단을 건너면서 그들은 사막에 대해 죽었다. 이렇게 건너간 사실들은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에서 단절시키고, 동시에 옛 사람에게 종언을 고함을 우리들에게 모형적으로 가르친다.

언약궤와 백성들 간에 왜 거리를 두어야 했는지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는데, 모두가 우리를 앞서 가신 우리의 선도자로서의 모형을 이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결코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한 것과 주님께서 겪으신 일은 항상 간격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경이로운 이 날은 성도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여호수아가 넘쳐흐르는 요단을 건너려고 도전하였을 때 담대한 믿음을 그가 가졌던 것처럼, 모든 인도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만 한다면 인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도자는 모든 가르침들을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함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임 가운데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으리라 당연히 여기고 있으므로, 그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지만,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결코 그것을 마음에 두어 조심하리라는 기대는 있을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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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