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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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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9. 12:17 횃불/2001년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의 개념

이 춘 원

우리는 지난 달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글 사전에 자유(自由)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① 마음대로인 상태, ⓒ 장해가 없는 활동, ③ 남에게 구속, 강제, 지배를 받지 않는 일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로 보든지 간에 이 자유는 죄악이나, 방종이나, 되는 대로의 육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이란 무엇입니까?

 

자유의 개념

헬라어에서 쓰고 있는 이 자유(eleutheria, freedom)라는 말의 어원적인 개념은,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이 자유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첫째로, 인간이 범한 모든 죄와 그 결과로부터 생긴 사망의 법에서 온전히 자유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법을 어기는 것,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 불의한 것,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 불신, 불순종을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16:9, 8:24).

불순종이 죄의 시작이고, 죄를 범한 후부터는 정욕과 교만이 들고 일어나 결국 사망에 빠지게 합니다. 범죄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죄인이고 죄인은 계속 죄에 종살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이 죄인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와 그 사망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어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얻은 사람은 결코 정죄가 없고 지옥 가는 영원한 멸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때문입니다( 8:1,2, 6:18,22). 이것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말하는 자유의 본질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지금까지 얽매여 있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율법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도덕적인 의미의 십계명과, 재판을 위한 민법과, 의식을 행하기 위한 율례 등으로 나눕니다. 또는 율법을 종합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된 구약성경 전체, 일반적으로 모세오경, 규범, 도덕법, 의식절차, 때로는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교훈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연현상과 원리는 물론,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과 그 양심까지도 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안에서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행해가고 있는 모든 유전과 조직과 형식과 규칙과 모든 방법이 율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 율법적인 행동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는 것, 복음으로 행치 않는 것, 외식하는 것, 육체대로 행하는 것, 혈육과 의논하는 것, 믿음이 아닌 행위에만 의지하는 것,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전에 있었던 것들을 믿는 것, 유대교적인 행동, 특별한 때들을 지키는 것, 약속이 없이 육체대로 난 것, 할례 받는 것,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 성령님의 인도하심 없이 온갖 육체의 일을 이루는 것, 새로 지으심을 받지 않은 것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일컬어 몽학선생, 초등학문, 종의 멍에, 육체의 일, 계집 종,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율법적인, 육체적인 상태와 그 제약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율법 안에서 자유롭게 되려고 애쓰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육체와 함께 그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새로 거듭나게 되면 그 사람은 새 계명 가운데서 행하게”( 6:4) 되는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고후 3:6) 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소욕을 좇아 죄를 짖는 것이 아니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와 율법은 멀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육체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율법의 지시가 따르고, 율법이 있는 곳에서는 육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이론이나 성경구절을 외우고 있거나 용문산에 가서 되는 것이 아니고 흑암 가운데 빛이 들어와 밝아지듯 음부에 빠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곧 구원의 복음을 받아 믿으면 위로부터 새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말씀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믿어지는 영적인 이적입니다. 결코 사람이 철학이나 신학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도덕이나 종교적 업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은 생명의 물과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6).

아직도 율법 아래 있거나 그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죄인은 은혜 아래서만 구원을 받고,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죄를 짓거나 증오하는 것은 사단의 행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악을 가리우는 데 쓰는 것이 아니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고 오직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벧전 2:16, 1:25, 2:12).

생명은 밝은 빛이요 썩지 않는 영생인 것처럼, 성령님은 죄와 어둠이 없으시고 육체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고후 3:17).

넷째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반드시 진리 안에 세워지고 항상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차가 철길 위에서만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진리, 곧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만 누리는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5:13).

그런즉 너희 (권리 곧) 자유함이 약한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 없는 진리 고수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아주 자유로운 독립인이었으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구원키 위하여 그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참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얼마든지 율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인색하게, 억지로, 체면상, 나타나기 위하여 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율법이요 잘못입니다. 예배 드릴 때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이 형식이라기보다는 거듭난 사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안 드리고 있을 때 형식이 되고 꾸미는 것이 됩니다. 원래가 어원상으로 이 신령과 진정이란 말의 뜻은, 정성으로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성령님과 진리에 따라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 교파마다 예배드리는 방식이 다릅니다마는 가장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가르친 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심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거짓 없는 구원의 복음으로서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교제를 나누면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지역적인 거리와 사회적인 환경과 교파적인 특색과 인간적인 외형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아무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3:28).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믿음과 넓은 자유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그들의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케 하신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피조물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

매를 가진 우리 자신들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18~24). 아멘. <다음 호에 계속>

 

(200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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