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댄 러지

시편 22편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의 혼의 언어를 독특하게 기록한 반면 창세기 22장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갈보리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2절에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언급(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의 기쁨을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각 구절마다 진술과 함께 점점 성장하며 로마서 8:32의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의 경이로움을 상기시킵니다.

 

창세기 22장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명확하고 포괄적인 유형 중 하나입니다. 골고다의 광경은 분명합니다. 먼저 이삭을 묶기 전에 나무를 지우고(6절) 그리고 이삭이 나무 위에 놓여집니다(9절). 그러한 표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인 골고다라는 곳으로 오기 전에 그분의 십자가를 지신 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나 골고다뿐만 아니라 겟세마네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들(5절)에게 명령한 것은 동산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주 예수님의 표현을 상기시켜줍니다. “내가 저 너머에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다가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아버지와 교통하셨습니다(마 26:36,39).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가면서 그들은 서로 교제하는 것을 즐겼지만, 그 어두운 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마 26:39). 이삭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가바다의 암시도 있습니다(9절). 우리는 행동이 자유로웠던 분(사 61:1)이 동산에서 묶이고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묶여있고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넘겨지는 것을(막 15:1)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동산 무덤과 부활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 회계사였던 아브라함은 자신과 이삭이 젊은이들에게 “다시 오겠다”는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5절). 이것은 속임수나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이 아이에게 묶여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번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야만 합니다 –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느니라”(히 11:19).

 

모리아로 가는 길(3-6절)

아브라함은 “멀리서 바라보니라”(4절)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원한 권고에 따라 창세 전에 갈보리의 위치와 때가 아버지와 아들에게 알려졌습니다(벧전 1:20). 갈보리보다 1,5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달, 날짜, 시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양은 니산월 14일에 “저녁 사이”(즉, 오후 3~6시),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때였습니다(참조, 출 12:6; 막 15:34). 그들이 “함께 가더라”고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삭이 아버지의 마음에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실패일지라도,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갈보리에 함께(교제하며) 갔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요 16:32).

 

아들의 불안(7-8절)

이삭과 아브라함은 모두 “어린양”(정관사를 주목하라)을 언급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오직 한 마리의 어린양만이 있습니다(참조, 출 12:6). 8절의 아브라함의 영광스러운 표현은 세 가지 번역이 가능하며 모두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친히 어린양을 주실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그래서 아버지께서 세상의 구주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어린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공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의 말은 분명히 모리아가 아니라 침례 요한의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고 하는 말씀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생의 장소(9절) – 모리아

일부 주석가들은 모리아의 의미가 “여호와께서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며, 분명히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모든 영광으로 드러났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모리아를 단 한 번만 언급하며 예루살렘에 위는 모리아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더라”(대하 3:1). 따라서 모리아는 갈보리 바로 근처에 있었으며 화해(속죄)(삼하 24:25에서 “이에 주께서…간구를 들으시매”를 읽어보라) 그리고 대속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바치는 대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삭의 보전 (10-10절)

아브라함이 손을 뻗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며 칼을 멈추게 했습니다. 갈보리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어둠의 시간 동안 진행을 중단하라는 하늘의 외침은 없었고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땅에서 울려퍼진 두 번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삭은 침묵과 순종으로 일관합니다(참조, 사 53:7).

 

숫양의 준비(13-14절)

보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예지로 필요를 마련해주시고(여호와-이레) 뿔(힘의 자리)로 인해 덤불에 걸린 숫양을 준비하십니다. 양털에 의해 걸린 숫양은 흠이 생길 것이고 흠 없고 점 없는 적합한 형태의 어린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유형은 이제 이삭을 “대신하여”(tj'T', 타하트) 바쳐질 숫양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타하트는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아래”로 번역됩니다. 숫양은 마치 이삭이 제단 위에 있는 것처럼 그 밑에서 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갈 2:20)고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합니다. 일반적으로, 제단의 꺼지지 않는 불은 모든 제물을 태웠습니다(참조, 잠 30:16). 그러나 갈보리에서 구주께서는 불에 태워지시고 만족하셨습니다.

 

신부의 기대(23절)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제단 위에 있고 죽은 자의 형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창세기 24장까지는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장에서 한 신부를 찾아서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녀는 결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녀는 이름없는 종에 의해 사막을 통과하여 안전하게 이삭의 품에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요 14: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