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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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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러지

요셉은 두 가지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라헬은 그의 이름을 “요셉”(창 30:24)이라고 불렀지만 파라오는 그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창 41:45)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이름의 의미는 요셉이 분명하게 잘 보여주는 주 예수님의 영광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셉은 “더함” 또는 “증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빼앗지 아니한 것도 되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시 69:4), 속건 제물의 법에 따라 그분은 오분의 일을 더하였습니다(레 5:16).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죄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 아니라 죄가 앗아간 것을 회복한 것 이상을 이루셨습니다. 창조보다 더 큰 영광은 갈보리에서 하나님께 지불되는 것입니다. 24명의 장로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늘의 큰소리의 합창은(계 4:11), 모든 피조물이 한 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위해 하나님을 찬미하는 새로운 노래로 전개함을 주목하십시오(계 5:9-13). 그리고 신자들은 단순히 아담의 무죄한 상태로 회복된 것 이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광을 얻었습니다(롬 8:30). 땅도 단순히 에덴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 이상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의 충만함은 단순히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든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은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구주”, “생명의 유지자” 또는 "비밀을 계시하는 자”등 모든 것이 아버지를 온전히 선포하신 그리스도께 아름답게 적용됩니다(요 1:18).

 

요셉, 아버지의 기쁨(1-4절)

요셉은 6개의 다른 집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는 주로 창세기 37장에 아버지의 집(요한복음)에 아들로서 소개되는 요셉에 관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또한 보디발의 집에서 봉사하는 종(마가복음), 감옥에서 고난받는 사람(누가복음), 바로의 집에서 주권자(마태복음)를 흥미롭게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야곱의 세대”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르우벤이나 시므온의 이름이 뒤를 잇는 것을 기대할 것이지만 그 대신 요셉이 등장하고(2절)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의 형제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를 말하며 높이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는 우리가 지역 모임들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요셉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기 위해 모입니다. 단순히 “그의 형제들”에 불과한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께 형제들의 활동과 행동에 대해 나쁜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곱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는데 같은 일에 열심이었던 요셉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요 2:13-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역모임의 명예를 위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야곱이 요셉을 그의 모든 자녀들보다 더 기뻐한 것은 당연합니다(3절).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대를 더럽혔고 (창 35)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의 이름에 “악취를 풍기게”(창 34) 했지만, 요셉은 그의 마음의 영적 갈망에 답했습니다. 그는 “노년의 아들”(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90살이었음)이었는데 이 표현은 지혜로 특징지어진 관용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분 곁에 있었고”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창 8:30)되신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었는데 문자 그대로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된 옷”으로 즉, 손과 발에 닿도록 지었습니다. 사무엘하 13:18절에서 다윗의 처녀 딸들이 입었던 옷과 같은 언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고귀한 출생과 높은 지위의 분명한 상징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요셉에게 그러한 겉옷을 입혀서 맏아들의 권리를 부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아버지는 그분의 흠없는 성품의 다채로운 영광이 달콤한 냄새의 향기로 올라감에 따라 그분의 아들에 대한 기쁨을 공개적으로 자주 나타내셨습니다(참조, 요 12:28).

 

통치할 운명의 요셉(5-11절)

앞의 구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의 한 유형으로 등장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그의 형제들을 다스릴 예정된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한 유형입니다. 비슷하지만 첫 번째 꿈은 지상의 영역(들판)에, 두 번째 꿈은 하늘의 영역(태양, 달, 별)을 배경으로 합니다. 현재 하늘(높은 곳에서의 영적 사악함)과 땅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상태로 있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천년 통치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하나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래 모든 것을 함께 모으실 것입니다(엡 1:10).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유익합니다(꿈을 해석하는 문제는 제외). 따라서 17세의 젊은이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계시는 다양한 삶의 시련을 헤쳐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위대하고 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형제들에게 멸시를 받는 요셉(12-24절)

요셉은 아버지(4절), 꿈(5절), 말(8절) 때문에 극심한 미움을 받았으며, 그 미움은 이제 온전히 드러납니다. 기꺼이 섬기는 종 요셉은 헤브론(“친교”)에서 세겜(“어깨”)으로, 그리고 도단(“법”)으로 보내져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잘”(샬롬) 지내는지 여부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정죄가 아닌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위로부터 오셔서 그분은 섬김의 짐을 어깨에 지셨고 율법의 속박 아래서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그분 자신이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농부의 비유(마 21:37-38)와 매우 유사한 말로, 그의 형제들은 “그를 멀리서 보고” 상속자를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옷을 벗기고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24절). 갈보리와의 유사점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는 분명히 공허하고 마른 구덩이였으며 구주께서는 버림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을 겪으신 후에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습니다.

 

요셉이 구덩이에서 구해지다(25-28절)

이 구절들은 부활에 대한 신성한 기대가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유다(헬라어 유다와 동의어)의 제안에 따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간 요셉을 그의 형제들이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건져 올렸습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증거를 상기합니다. “그분께서 또한 무서운 구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나를 끌어올리시며 내 발을 반석에 두시고 나의 가는 걸음을 굳게 세우셨도다”(시 40:2). 그 과정에서 요셉의 피 묻은 겉옷이 아버지에게 보여졌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게신 요셉이 “그분의 피로 인하여” 높은 곳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사실 즉 오늘날 영적으로 다가오는 날에 육체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알게 되어 기뻐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