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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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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12가지 독특성

노만 크로포트

아래에 열거된 사항들은 모임 특유의 규례들입니다. 이들 진리 중 일부에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단체들이 있긴 하나, 다만 여기서는 그 진리들에 대한 완전한 일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유일한 지침으로 여기고 인위적인 조직이나 인간의 전통은 제쳐두는 그러한 곳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육신의 연약함과, 그로 인한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회복과 보존은 새로운 형태나 새로운 방법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역할에 대한 신약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으로 되돌아감으로써만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데 교회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오늘날 모임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3:2). 죽게 된(ready to die)은 미완료 시제(혹은 진행형 시제)로서 이들 진리들이, 전달된 그 시각부터 죽어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진리들은 오직 자아(自我)와 죄와 종교적인 관습과 세상적인 방법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충실함으로써만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1] 독립적이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별개로 지역적인 교회가 실재(實在)하며, 고유하며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러한 신령한 몸의 진리를 알고 있는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유감스럽게도 이 총체적인 몸과 지역적인 몸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혹, 모임(an assembly)이 전체 몸과 구분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이 전체 몸의 일부, 혹은 그 축소판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모든 부분을 합칠 경우 자연전체 몸이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종종 귤이 그 비유로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 귤은 껍질을 벗겨 알갱이를 쪼개면 열 조각으로 나뉩니다. 이 열 조각을 열 사람에게 한 개씩 나눠줄 경우 각자는 귤을 들고는 있지만 원래의 그 귤을 손에 든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개의 교회는 교회이기는 하나 본래의 교회는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곤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담긴 고린도전서 1:1과 같은 말씀들과 대치됩니다. 이러한 주장의 또 하나의 모순점은 귤은 쪼개진 부분들을 다시 합치면 원래의 덩어리를 이루지만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모임은 합쳐진다 하더라도 각 모임이 전체 몸의 일부가 아닌 까닭에 전체 몸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모임은 어느 모체(母體)의 부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눈에 보이는 증거자로써 독특하게 서 있습니다. 요컨대 모임을 이루는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임에 분명하나 모임 자체는 그보다 더 규모가 큰 어떤 전체의 한 요소거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전체 몸과 모임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차이점 중 일부는 신분상의 진리와 실제상의 진리 사이의 차이점들입니다. 예를 들어 누구에 의해서 그것이 세워지며, 어떻게 그리고 언제 우리가 거기에 받아들여지며, 흑 신자들이 거기에서 제외될 수 있지는 않는지, 언제 어디에서 그것이 함께 모이는지, 남자와 여자 간에 구별이 있는지, 그릇된 요소가 침투될 수 있는지, 완전한 연합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분당이 있는지, 사단이 미혹과 부패의 역사를 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존재 목적이 이 땅에서의 증거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인지 등등의 문제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많은 차이점들이 있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의 광의(廣義)와 협의(狹義)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대조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모임을 형성하기 위해 어떤 조직적인 방법을 시도한다면 그 고유의 독립성을 잃게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모임, 혹은 그 장로들이 주님 외에 다른 어떤 대상에 책임을 진다는 암시조차 나와있지 않습니다. 모임과 주님, 그리고 모임 상호간의 관계가 계시록 1-3장의 일곱 모임들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관계는 주 예수님을 축으로 해서 살들이 각각 그분께 직접 연결돼 있는 바퀴와 흡사합니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결합을 시도하는 그 순간 우리는 살 끝에 타이어를 씌움으로써 하나의 인간의 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모임이란 살아있는 유기체이지 어떤 조직의 일부가 아닙니다.

관련 성구 : 16:18, 18:15-20, 2:41~42, 고전 1:1~9, 3:9~17, 5:12~13, 고후 6:16, 5:23~27, 2:1.

 

[2]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인다.

여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그러한 이름입니다. 진실로 그 어떤 이름도 이 최상의 이름의 자리에 대신 오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다른 믿는 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되는 모든 이름을 정죄합니다. 우리에게 대하여 일컬어지는 그 아름다운 이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교리나 의식, 혹은 건물이나 그밖에 다른 어떤 이름이 아닌 오직 그분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관련 성구 : 18:15-20, 고전 1:1-10, 5:4, 1:21, 2:9~11, 2:7.

 

[3] 복수 장로제를 취한다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성령에 의해 준비되고 세움을 입은 다수의 장로들에 의해 이뤄 집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인 권위는 없습니다. 장로들은 목사의 결정을 아무런 비판없이 승인하는 위원회나 목사의 일을 돕는 보좌관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돌아보는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주님과 서로에게 책임을 집니다. 그들이 지닌 권위는 임의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통해 그에 대한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관련 성구 : 20:28, 딤전 3:1-7, 1:6-9, 벧전 5:1~4.

 

[4] 신약성경상에 나와있는 만인 제사장직을 실행한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성직자와 평신도 체제, 즉 제사장직을 성직자가 독점하는 체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가문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한편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제사장직은 모든 신자들의 생득적(生得的)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제사장 계급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요, 최악의 경우 우상을 섬기는 이교주의로 전락하는 셈이 됩니다. 주님께서 니골라당 제도를 증오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특권 중 하나가 바로 이 거룩한 제사장직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 각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휘장 안, 곧 그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권리를 지닌다는 것을 뜻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이 공히 이 커다란 특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만 교회를 대표하는 공적인 제사장직 수행은 형제들의 측량할 수 없이 큰 특권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직은 성직자가 있는 곳에서는 수행될 수 없습니다.

관련 성구: 19:6, 12:1~8, 고전 14:26~39, 벧전 2:5~9, 1:5~6, 2:6,15, 20:6.

 

[5] 은사가 다양하게 활용된다.

서로의 은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모이는 모임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일단 우리가, 은사는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성령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일인 목회나 전체 목회를 내세우는 일체의 제도를 거절해야 합니다. 모든 형제들이 다 목자나 교사나 전도자의은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신약성경을 주의깊게 살핀다면 모든 은사가 한 사람에게 맡겨진 일인 목회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 큰 은사(gifts)를 사모하라는 말씀은 어떤 은사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지기를 사모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임에 나타나기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일인 목회가 신약성경의 목회 형태라면 위의 말씀을 비롯한 신약성경상의 많은 말씀들이 복수가 아닌 단수 명사 gift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더욱 큰 은사인 목사를 사모하라는 권고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모임 가운데 항상 복수로 존재하는 은사들을 사모하라는 권고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성경이 가르치는 다양한 은사 활용을 실행해 온 많은 모임들이, 교육받은 목회자가 필요하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은 목회와 가르침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주님께 헌신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일인 목회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매우 슬픈 헌상입니다. 우리는 경건과 성숙과 은사의 활용을 추구하는 한편 성직자 제도로 유도하는 일체의 경향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관련 성구: 12:6~8, 고전 12:1~11, 28~31, 14:15~39, 4:8-16.

 

[6] 떡을 떼는 일을 최우선시한다.

최근에 우리는 모임과 같은 초대교회 공동 예배에로의 복귀 현상이 오랜 세월 동안 실행되어 왔다는 내용의 기성 교회 사람들의 기사를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계에서는 이러한 단순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요청이 높아가고 있는 반면에 당황스럽게도 모임 내에서 변질을 의미하는 두 가지 중대한 현상이 일고 있는데, 그것은 떡을 떼는 일을 경시하는 것과 복음 증거시간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제쳐놓은 예배 모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임을 특징지우는 뚜렷한 요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일과 그리고 기도입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하늘과 가장 근접하는 기회인 떡을 떼는 일을 경험해 온 어떤 신령한 신자가 그 일에서 돌이켜 소위 공중 예배를 위한 미리 준비된 형식의 예배의식을 좇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납득하기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떡을 떼는 모임을 최우선적인 시간, 즉 매주 첫 날 모여지는 모임 중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여기고 그렇게 실행합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누가의 기록은 신약성경의 다른 명령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한 규례를 우리에게 제시해 보입니다. 이 규례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 및 서신서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관련 성구: 22:14~20, 4:19~20, 2:41~42, 20:6~7, 고전 11:23~34.

 

[7] 하나님의 말씀만을 절대 유일한 권위로 믿는다.

성경의 영감성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성경이 그들의 유일한 권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판단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어떤 성문화된 신앙고백문이나 교회의 결정사항이나 체계화된 법규나 회의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지침이 됩니다.

모쪼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견해나, 사람이나 제도에 대한 충성으로부터 벗어나 그분의 말씀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우리 가운데 보존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인본적인 해석체계나 현대 사상에 근거한 주장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일절 용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관련 성구: 4:4, 5:18, 24:35, 10:35, 20:32, 김후 3:16~l7, 벧후 1:16~21.

 

[8] 상호간에 영적인 유대를 갖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조직을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체계화된 질서와 잘 짜여진 구조는 관련된 일들이 통제하에 있다는 안도감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이와같은 인위적인 질서를 선호하는 경향이 지난 여러세기 동안 하나님을 위한 증거 활동을 오염시켜왔습니다. 모임 상호간에 존재하는 교제는 영적인 것이며 인위적인 방법의 산물(産物)이 아닙니다. 모임은 모든 활동에 있어 독립적이지만 교제에 있어서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범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깊은 영적인 관심이 있었으며, 기근 시에는 안디옥 교회가 기쁜 마음으로 유다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에서의 복음의 확장은 안디옥과 예루살렘 성도들의 깊은 공동 관심사였습니다. 이러한 모임 간의 상호의존과 영적인 유대가 신약성경에 나타난 질서의 주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한 모임의 모든 활동은 다른 모임들에 끼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련 성구: 11:22~30, 14:23~28, 고전 9:1~15, 4:14~19.

 

[9] 여자들은 잠잠한다.

모임에서 행해지는 여러 진리들이 인간의 견해와 상충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표현은 요한복음 3:16 만큼이나 그 뜻이 명료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누가, 언제 말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 성별(性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인기 없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자들은 모임의 집회에서 잠잠할 것을 명백히 가르칩니다. 다행히도 모임의 자매님들에게는 이런 가르침과 관련하여 어떠한 문제도 야기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대하고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모임의 활동의 중추를 이루는 많은 경건한 자매님들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는 끝났지만 경건하고 존경스런 여인들은 연연히 그 맥을 이어왔습니다.

관련 성구: 17:4, 고전 14:34, 딤전 2:8~15.

 

[10] 성별된 재정 원칙을 고수한다.

불신자들에게서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은 모임의 선구적인 복음 전도자들의 관행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이 능력을 발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는바, 우리는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회들을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해 왔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헌물을 통해 왕같이 생활하는 것을 그들의 특권으로 여기는 자들로 인해 주님의 이름에 크나큰 불명예가 끼쳐지는 현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간증이 저들의 만용(蠻勇)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에 겸허히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껏 다뤄온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그러한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는 헌물을 부득불 거절하는 일입니다.

관련 성구: 요삼 5~8(잠언 15:8, 21:27은 모든 시대를 위한 원칙입니다).

 

[11]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복한다.

우리는 구원과 봉사에 있어서 성령의 지도를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성령은 은사를 부여하고, 길을 안내하고, 능력을 주고, 일을 이루고, 열매를 맺고, 그리고 종들의 미약한 노력을 축복하는 거룩한 위(, person)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깨닫게 하고, 유죄를 선고하고,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십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 및 사역 전반에 있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의존합니다. 인간의 구상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대신한다는 것은 심히 옹색한 처사입니다. 기도나 예배를 위한 모임을 가진 후에 우리는 종종 그분의 인도하심에 놀라곤 했습니다. 어떤 인간의 조직도 이러한 신령한 결과들을 모방해 낼 수 없었습니다.

관련 성구: 1:12~13, 3:5~8, 16:7~15, 8:14~17, 26~28, 고전 2:2~5, 13~16, 고후 4:3~6.

 

[12] 권징을 합당히 행한다.

성경에 분명한 분부가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내에서 권징이나 출교를 실행한다는 것은 이색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권징은 잘못에 대한 징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모임의 권징의 목적은 모임의 순결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범죄한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도덕적인 누룩과 교리적인 누룩은 모두 누룩없는 자로서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말끔히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관련 성구: 18:15~20, 고전 5:9~13, 딤전 1:18~20.

이상이 모임의 독특한 특성을 모두 열거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들 진리들 하나하나에 유의한다면 분명 이들 진리들이 준수되는 모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