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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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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의 전파

존 그랜트

디모데후서로 다시 가시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3 14절부터 4장 마지막까지 봉독하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각 장의 내용들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그림 즉 비유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3장에서는 예언에 대해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의 전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3장과 4장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15절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 배경설명을 좀 드리고자 합니다.

3장을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왜냐하면 3 1절에서 사도바울은 말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미래의 영적인 상태가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이 마지막 때 세상의 특징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 현재 사회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 위에다가 5절에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가 있다고 덧붙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형식은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힘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에게 이런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10절 사이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8절에서 특징을 배울 수 있는데 이것은 출애굽기에는 없는 가르침입니다. 8절에서 모세를 대적한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8절에서 그 이름을 듣습니다. 그 사람들은 얀네와 얌브레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교사들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거짓된 교사들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10절에서 13절까지는 앞에 나온 상대와 대비되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우리 가르침에 대한 모본을 우리가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만 가르치고 하나는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르치는 말씀 그 자체에 모본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은 우리가 가르치는 것보다도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르침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서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14절로 가고자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계속 거하라고 합니다. 계속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도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로이스와 유니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서도 배웠습니다. 외조모와 어머니에게도 배웠을 뿐 아니라 바울에게서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계속 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1 5절에서 그의 외조모와 어머니가 믿는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나오지 않는데 아버지는 아마 믿지 않는 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1 5절에 아버지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바울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1 2절에 보면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했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그의 전한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바울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의 배경을 여러분들은 아실 수가 있습니다. 경건한 외조모와 경건한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좋은 모본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바울 이전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의를 시켜드리고 싶은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5절에서 그 이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배웠고 그것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배우는 것은 어떤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확신적인 것은 그것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가 배운 것을 그 개인의 삶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관한 확신을 그는 가졌습니다. 그는 여기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배운 성경을 그 자신의 경험으로 가졌습니다. 그가 왜 계속 거해야 되는 그 이유입니다. 15절에 보면 그 이상의 지식을 보게 됩니다. 매우 어려서부터 그는 성경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성경 즉 거룩한 책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로 구별된 책인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 거룩한 성경을 아주 자세하게 분명히 배웠음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전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약성경이 완전하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 이 성경말씀을 가르침 받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제 어린 아이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장래 그 아이에게 큰 열매를 갖고 오는 결과를 초래 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성경은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세가지 중요한 것

16,17절에서는 성경에 확신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경입니다. 15절에서는 구약성경을 말했다면 16절에서는 모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세가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은 아담이 만듦을 받았을 때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에 아담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감동이라는 말은 그 때 사용했던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 성경은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은 책인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문학서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성령께서 이 책 속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른 책과 왜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수천년이 지나도 이 책은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기원과 내용을 성령이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관한 첫번째 기록된 이유인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 전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권위입니다. 이것 중 어느 것 하나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실행하는가는 전부다 성경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두번째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유익합니다. 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했던 것처럼 매우 유익합니다. 유익한 것은 곧 세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내용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반드시 성경을 배경으로 가졌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 성경 말씀은 질렸다 이제 실행을 우리가 듣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아주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동은 바로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될 것을 그 근본인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책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우리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들어오는 위험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길을 가다가 주의판을 보면 주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판을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고들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바르게 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세워서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우리 삶 속에 잘못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시 바르게 세우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잘못된 것들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첫번째는 교훈이고 두 번째는 책망이고 세 번째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를 더해야 되겠습니다.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야 되는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겠습니다. 이것은 교훈하기에 유익합니다. 책망(경고)하기에 유익합니다. 바르게 하기에 유익합니다. 의로 훈련하기에 즉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훈련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지적인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첫번째 성경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말씀을 일러 줄려고 읽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설교를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면 위험합니다. 전하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는다면 위험합니다. 첫번째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읽으시고 여러분의 삶을 바로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남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7절을 보고 3장을 줄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이 사람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뼈가 부러졌을 때에 그 뼈를 바로 맞추는 그런 내용에 사용된 말입니다. 바울은 이상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의 팔이 부러졌으면 여러분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먼저 부러진 팔을 바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부러진 팔이 맞추어지듯이 온전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온전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번째를 더했습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데 많은 빌딩들이 있습니다. 한국이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나라보다도 큰 배들을 건조하시더군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영국에서 많은 배들을 만듭니다. 배를 만든 다음에 진수 시킵니다. 곧 바로 항해를 나갑니다. 그것은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엔진을 배에 장착합니다. 캐빈을 장식품으로 완전히 장착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합당한 자리에 갖추어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한 용어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함이니라는 뜻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마차가 사람을 운반케 하기 위해서 온전케 한다는 것 말이죠.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와 같은 갖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행하기 위해서 내 삶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할 수 있고 여러분은 저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갖춤이 끝났습니까? 섬기기 위해서 갖춤이 끝났습니까? 만약 우리가 엔진을 장착하지 않은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갖추어지지 않고 섬김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 잘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도 잘 할 수 있고 그것도 행하는 것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쓰고 있는 이 말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섬기기에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온전하게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317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도록 바울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맡겨진 책임

이제 4장으로 가시겠습니다. 4장은 두 세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4 1~8절까지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내가 명하노니 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부터는 바울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절 이후부터는 바울의 섬김의 결론입니다. 이 장에서 세가지 부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책임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숙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서 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주십시오.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가운데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여기서 휴거를 언급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심판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자가 오실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다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신에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주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엄히 명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날에 주님 앞에 나타나겠습니까? 오늘 살고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아마 그 날 우리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날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그날 더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책임의 엄숙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2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행동에 관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공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것은 서서 계속 행할 것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자러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깨어서 하라는 뜻입니다. 말하기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가 합당하다고 보이든지 그렇지 않다고 보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 상황을 자기 상황에 맞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때가 여러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합당치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을 방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것이 방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시간표에 의해서 방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방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책하며. 경책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경계하며. 이것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권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또는 교훈하기도 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심각한 것을 경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격려하고 그리고 권면을 받게 하는 것을 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합당하든지 아니든지 말입니다. 3~5절에는 이 시대가 보여주는 특성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을 추구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올바르게 가르치는 자는 사람을 즐겁게 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있는 그 자리에서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어느 영역에 있든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책임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전심전력해서 처해 있는 그 위에서 주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영역에 있든지 여러분이 채울 수 있는 분량의 양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어떤 그릇에다가 액체를 채울 수 있는 분량대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분량의 그릇에다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빈 그릇이 남아 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6절로 가시겠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우리는 봅니다. 디모데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너도 이렇게 하라 나도 했으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그것은 빈 그릇일 것입니다. 이제 내가 곧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대신해야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한 네가 내 자리를 대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다 채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너가지를 그의 섬김에서 여러분이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자신을 관제로 드릴 준비가 됐다. 그가 말한 실제 의미는 이것입니다. 나는 이미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출발점에서 가고자 하는 거기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야 할 규칙의 그 선을 돌파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올바르게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었다 했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떠날 기약이라는 말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천막을 걷어서 이동준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배가 항해를 위해서 닻줄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배라면 배에 묶인 줄을 풀고 항해할 준비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영원으로 항해할 준비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이 시기에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7절이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섬김에서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는 마치 레슬러가 레슬링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말입니다. 성경에는 선하다는 말을 두 가지로 쓰고 있습니다. 첫째 선하다는 말은 유익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의미는 아름답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름답다, 매혹적이다라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아주 매혹적인 방법으로 싸웠다. 나는 원칙을 지켰다. 나는 원칙을 깨지 않았다. 여러분이 레슬링하는 레슬러를 보시게 되면 그는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선한 레슬러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인 레슬러로서 선한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레슬러처럼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운동선수처럼 그는 고울 지점을 통과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레슬러처럼 되기를 바라고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런 영적인 운동선수가 되기를 바라고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거의 마지막 결승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 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을 그는 지켰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증거입니다. 그는 갔습니다. 그의 봉사에서 그는 아쉬움이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8절에 그의 기대를 보십시오. 그는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그날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말합니다. 우리와 관련된 그 심판대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만 아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주님의 나타남을 기뻐합니다. 이 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날을 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의로운 재판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지 아니한 로마재판장의 스승이다. 우리는 그것을 1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올바르지 않은데서 재판을 받지마는 언젠가는 의로운 재판정에 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의 면류관이라고 말할 때 경기장에서 우승자가 월계관을 쓰는 것을 바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자의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임금이 쓰고 있는 법적인 왕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주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저는 더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제 주님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한 그 일이 그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이 이것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명성을 얻기 위해서 형제 자매님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

9절 이후에는 바울이 디모데를 환기시키는 디모데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에 여러분들이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여기서 4가지 사람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4가지 부류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은 10절의 데마입니다. 데마는 믿는 자입니다. 골로새서 4 14절을 보시면 데마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 24절에서도 데마의 이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일했습니다.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얼마나 슬픕니까? 데마는 나를 버리고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위기에서 데마는 바울을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장래를 사랑한 것을 봅니다. 바울은 장래를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고 현재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를 사랑하십니까? 미래를 사랑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오시는 미래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에 두게 될 것입니다. 데마는 더 이상 미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데마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인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바울을 떠났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보고 로마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의 수도의 부를 보았습니다. 그기에 사람들이 행하는 연예계를 보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도 현재를 사랑해서 가버렸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오실 미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사랑하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래서 데살로니가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모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모임과 관계를 계속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디든지 가면 모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모임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저는 정리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주님의 오심을 가르쳤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주님의 휴거가 있습니다. 후세에서는 그의 이 땅에 지상재림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오심을 사랑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질 것입니다. 아마 데마의 생각이 데살로니가 모임에 퍼지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데마의 영향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실패하는 종은 그 삶에서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로 이것은 떠남입니다. 배반입니다.

다른 사람을 우리는 또 봅니다. 그리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12절에 보면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비판하지 않습니다. 디도가 달마디아로 간 것을 바울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기고를 왜 보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는데 그 디모데를 바울은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기고가 그기에 보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리스게는 가르치기 위해서 갈라디아로 가고 이제 디도는 한 번도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달마디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고 디도는 디모데가 에베소를 떠나기 때문에 디모데를 대신해서 에베소로 가고 이 사람들은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 사람처럼 될 것이지 데마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한 부류가 있습니다. 11절에 누가와 마가가 나옵니다. 9절에는 디모데를 바울이 부릅니다. 누가는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바울의 생애 마지막에 의사가 함께 했다는 것은 좋습니다. 다 떠나고 누가 혼자만 바울과 있었습니다. 마가를 데려오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큰 격려가 있습니다. 마가는 처음에 실패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마가는 자기 고향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처음에 실패했지만 나중에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실패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가처럼 되어 오라 여러분의 실패에서 유익한 쪽으로 돌아서시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을 바울은 쓰기를 원했습니다.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에게 헌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바울이 보냈습니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뒤에 바울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주님을 떠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뜨거워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데 부지런하고 헌신되던지 해야 합니다.

또 마지막으로 한 부류를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14절에서 그 이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입니다. 내게 해를 많이 보였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기를 바란다. 제 성경은 바울이 기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합당한 때에 그에게 갚기를 바라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서술이고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이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 사람을 주의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다음절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했다. 아마 제가 썼으면 이렇게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쓴다면 나에게 해를 많이 끼쳤기 때문에(실제로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내게 많은 해를 보였다 했습니다. 알렉산더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바울에게 많은 디메지를 주었습니다. ) 너에게도 해를 많이 끼칠거라고 썼을 텐데 그러나 바울은 주의를 환기 시킬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를 저를 주의하라 나를 대적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말을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전한 말씀의 대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던 관계하지 않겠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내가 전한 말씀에 해를 가할까 걱정이다. 그 말씀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과 같이 무죄한 전도자리도 말이지요. 모든 분들이 이 진리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실패해도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바울 본인에게 한 것보다도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적한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가르침에 대적하는 것은 대단히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내 옆에 없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여러분은 바울을 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은혜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데마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마는 말입니다. 데마는 실명을 언급했지만 나머지 자기를 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실패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심판대 앞에 설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섰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네 그룹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위대한 그룹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네 그룹 중에 가장 큰 것은 주께서 바울 곁에 섰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 곁에 섰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강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전도의 말씀이 온전케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제 복음을 듣습니까? 아마 이 복음은 분명히 심문을 받을 때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하게 하사 심문 받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전도의 말씀을 하게 하시고 사자의 입에서 건졌습니다. 이제 거의 편지가 막바지에 왔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물론 구리장색 알렉산더로부터도 건져내시고, 여러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죽음에서 나를 건져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인물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볼 때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인사를 써 보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장에서 오네시보로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재무 담당관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왔다가 다시 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드로비모는 병이 들었기 때문에 밀레도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절을 여러분들이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그는 네 사람의 문안을 적어 보냅니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 이 사람들의 이름을 성경 이곳 말고 다른 어디에서 발견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분명한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데서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기 외에는 이 네 사람의 이름이 바울의 편지 가운데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굽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대답을 제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새로 믿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 생애 마지막에 새로 구원받은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감옥이 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바울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온갖 어려움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씨를 뿌렸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가이사의 뜰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시위대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 22절에 보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첫번째 투옥될 때였습니다. 두번째 투옥되었을 때에는 시저 황제를 섬기는 사람 가운데 네 사람이 구원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생애 막바지에 복음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정리

이 서신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서신을 정리할 때 네 가지 말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는 1 6절입니다. 이것은 오후에 다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두번째는 2 1,2절입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은사를 불일듯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믿음을 전파하고, 여기서 말하는 들은 바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말씀의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3 17절입니다. 우리가 이미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즉 하나님의 사람에 걸맞게 되며,

마지막으로 4장에서 5절입니다.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네 직무를 이루어라. 네 직무를 완수하라.

첫번째는 온전히 불일듯하게 하고 두번째는 온전히 믿음을 전하고, 세번째는 온전히 합당하게 하고 네번째는 직무를 온전히 이루고 그런 다음에 바울은 펜을 놓았습니다.

마감하면서

이 편지를 쓴 얼마 후에 바울은 로마를 떠났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길 가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고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시점에 바울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주님을 말입니다. 이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꾼 그분을 말입니다. 교만한 유대인에서, 그가 온갖 교만한 입장에서 겸손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했습니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부은 바가 되고 말씀을 마감하면서 한가지 말씀을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부음이 되면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액체를 부어드리는 관제입니다. 관제적 액체를 부어드리는(우리성경에는 전제로 되어 있음)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어떤 제물을 제단 앞에 갖고 나간다면 그 제물 위에 액체로 된 관제적 전제를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제물에 기쁨으로 드리는 것과 즐거움을 표시하는 그런 제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세 친구가 베들레헴 샘물을 길어서 물을 부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다윗이 마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관제로 부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실 때 그와같이 드려짐의 기쁨을 나타내는 제사가 바로 붓는 전제 즉 관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나의 모든 삶이 제사와 같이 드려졌다. 로마성도들에게 그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12:1). 나는 그렇게 했다. 주님을 만난 이후에 나의 모든 삶은 바로 이와 같은 제사로 드려졌다. 그 전제 맨 위에 나의 죽음이다. 나의 모든 삶은 전제처럼 드려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 거기에다가 또한 나의 죽음이 봉사를 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습니다. 이 편지는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충성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도 충성스럽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