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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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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6. 15:45 빛 가운데로 걸으며

목사님들이여, 성경 좀 믿읍시다

 

유대교에는 성직제도가 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들인데 그들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직을 수행했는데 그들은 에봇이라는 특별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유대교가 개량되어서 기독교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도 특별한 옷을 입고 특별한 일을 전문으로 하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신도와 사제나 목사 같은 성직자 계급의 구분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다릅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이 성직제도는 요한계시록 2 12~17절에 나오는 버가모 교회로 상징되는 시대에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대략 주후 약 3세기~5세기에 해당되는데 이런 조짐은 이미 에베소 교회(2:6)안에서 싹트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성경은 니골라당의 행위(2:6), 또는 니골라당의 교훈(2:15)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니골라당이란 말은 평신도(백성)의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어거스트 반 린은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전도출판사 역간)에서 2 15,16절에 나오는 니골라 당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단순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성직제도를 의미한다. 이 성직제도란 성직자가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신약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도입니다. 신약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거나, 성직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암시조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교회 안의 직분은 은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의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신분 자체가 거룩하며, 받은 은사가 거룩한 은사이며, 그 은사를 사용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이 거룩한 일들입니다. 어느 경건한 자매는 이 놀라운 은혜의 진리를 깨닫고 자기가 요리하는 주방에 여기에서 하루에 세 번씩 거룩한 봉사가 행해지고 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일찌기 만인 사제론을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제이다라고 했습니다. 칼빈도 그 견해에 동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알고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여 적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성직제도에는 두 가지 큰 폐단이 있는데 그 하나는 소위 성직자들 스스로가 우월감을 가지고 은연중 군림하려는 자세를 갖게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위 평신도라고 격하된 사람들은 거룩한 일은 모두 성직자들이 하겠거니 하고 자기의 은사를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는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목사이면서도 성직자인체 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는 종들이 있습니다. 노숙자나 장애인들을 위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멸시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서, 그밖에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런 곳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희생하면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칭찬 받는 것을 도리어 부끄러워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힘입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7:10)고 겸손해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분들이 보석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이 사회가 지탱되고 있으며 그런 의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즉시 내리지 않고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회는 그런 분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그런 목회자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많은 일들이 기독교계 안에서 아니 목회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가 향 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10:1).

죽은 파리가 향 기름으로 악취를 나게 하는데다가 그 수가 많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목회자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목사님들이 성경을 성경대로 올바로 믿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말씀대로 양떼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면 한국 교회가 바뀔 것입니다. 교인들이 변화되고 나라가 변화될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변화되지 않고는 절대로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절대로 교인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거듭날 수 있으며, 목사님들이 나그네의 삶을 살지 않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처럼 목사님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교인들의 목사님에 대한 신뢰가 놀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실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들은 존경을 받아야 하고 목사님들의 말은 신뢰해야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그런데 문제는 진리의 말씀과 그 가르침,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데 진력하지 않고 다른 것에 치중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며, 교인들 중 많은 경우가 그런 목사님들을 무조건 맹신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이야기를 해주어도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는데요 하거나 그건 우리 목사님 말씀하고는 틀린데요 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자기 목사님 말씀이 성경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고, 보이는 목사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대상입니다(물론 요즘 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교인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목사님들이 그 교인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을 선한 목자로서 올바로 인도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해소될 것이고, 기독교가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구태여 교회 갱신이나 개혁을 부르짖지 않아도 될 것이고 교회나 교인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교파 분열을 일삼는 것은 교인들이 아니라 목회자들이며, 파당을 일삼는 것도 대부분 목회자들입니다. 교인들이야 그저 순진한 마음으로 목회자가 이리 가자 하면 가고, 저리 가자 하면 갑니다. 이것이 옳다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저것이 옳다 하면 또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인들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되겠습니까? 두려운 마음으로 다음 말씀을 상고해 보십시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9:16).

성경의 목자들은 앞에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04절에서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충성스런 사도인 바울도 빌립보서 3 1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성경의 목자들은 이와 같이 뒤에서 채찍을 들고 겁을 주는 목자가 아니라 앞서가며 본을 보이는 목자인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이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 그 말씀대로 목회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는 얼마나 유창한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습니까? 웃기고 울리면서 청중들을 사로잡고 아멘. 믿습니다라는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지게 하고 있습니다. 또 각 교단마다 얼마나 유명한 부흥강사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기독교요? 교인들보다 그들을 인도하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은 인정하시겠지요?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을 길러 낸다는 신학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해마다 그 신학교를 졸업하는 신학생들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일까요?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목사는 직업이 아닙니다. 직분이며 은사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 지역 교회 안에 여러 명의 장로가 있어서 그 중에 어떤 장로는 선지자의 일을 했으며 어떤 장로는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다른 장로는 목사(목자)의 일을 했고 교사의 일을 하는 장로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에베소서 4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직분을 주신 목적은 에베소서 4 12절에 있는 말씀처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려 하심이었습니다.

이 은사들 중에서 사도와 선지자는 성경이 완성되므로 그 사역이 끝났지만 다른 은사와 직분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직분 중에 어느 한 직분의 우월성이 언급된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목사란 호칭이 에베소서 4 11절 한 군데밖에 없는 이유는 그 직분이 장로의 사역 중에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목회서신에 장로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입니다. 물론 장로나 감독은 같은 직분의 다른 호칭입니다(딤전 3:1~13, 4:17~20, 20:17,18 참조).

에베소서 4 11절의 목사목자를 의미하는 포이메나스(poimevna")라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Pastor(목사)도 그 어원은 목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11). 히브리서 13 20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양의 큰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는 목자라는 의미라면 그 교훈은 자명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덧붙여서 장로, 감독, 목자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장로들감독자로서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며 목자로서 양 무리들을 돌보고 먹여야 합니다

자기 직분의 의미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직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미 교회 직분에서 말씀드렸지만 목사를 포함해서 교회 안의 직분은 지위(position)가 아니라 기능(function), 즉 영적으로 은사의 문제인데 이것을 잘못 생각하여 착각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분도 단순히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안수를 받아 정해진 시간에 설교를 하고 월급을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분의 말처럼 (영적으로) 텅 빈 머리에 텅 빈 손을 얹어서 만들어진 목사는 결코 성경적인 목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직분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는 것입니다. 그 직분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직분이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 된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대화 중에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질 않아서 일류대학에 못 들어가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차 했겠지만 무슨 얘긴지 아시겠지요? 목사님이 그렇게 애기했다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 신학교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일류대학에 못 간 학생들이 나가는 그런 학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그런 예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학교를 나와야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체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신학교 만들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교를 나와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모두 주의 종(?) 행세를 하니 목사보다 소위 먹사가 더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틀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같이 최고의 학문을 한 사람도 쓰시지만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처럼 학문 없는 범인(4:13)들도 쓰십니다. D. L. 무디는 초등학교도 못나온 학력의 소유자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놀랍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나와서 성경적인 목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 신학교를 안 나왔어도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지만 목사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많고, 신학을 안했지만 충성스런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신학교가 정말로 하나님의 종을 길러내는 곳입니까? 한 때 TV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던 어떤 철학 강사가 신학을 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말을 하고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유명하다는 가수는 미국에서 신학교를 나온 목사로서 바로 위의 철학 강사를 마음으로부터 스승으로 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괴한 제목의 책도 냈습니다.

그 뿐입니까? 보수적인 교단의 성직자로 자처하는 어떤 목사는 놀랍게도 섹스를 통한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란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이며 삶에서 섹스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면서, 가장 이상적인 섹스는 프리섹스, 성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거나,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행복한 섹스를 위해서는 가학적인 성행위도 필요하다는 등의 궤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또 어떤 목사는 남몰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열 한군데나 불을 내다가 붙잡혔는데 그 이유가 사람들이 교회에 한 번 왔다가는 전부 다른 교회로 가는데 화가 나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영과 혼과 몸과 삶을 망쳐 놓았는데 그 시한부 종말론자들 중에는 목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주장이 허구로 드러난 다음에도 대부분 여전히 목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또 교회와 교인들을 매매하는 목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곳에 건물을 임대해서 개척교회를 한다고 사람을 끌어들여 교인을 만들어 놓고는 그런 교인 수 십 명만 되면 교인 한 사람 당 기본을 100만원으로 쳐서, 광고를 보고 찾아온 후임자에게 팔아 넘기는데 그 때 조건에 따라 또 프리미엄이 붙는다고 합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100만원에 팔린 몸이라는 것도 모르고, 또 떠나는 목사가 자신을 돈 받고 팔아먹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떠나는 하나님의 종(?)이 섭섭하다고 봉투 쥐어주면서 아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돈 주고 산 하나님의 종(?)을 두 손 들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교계 신문에 교회 후임자 구함이라고 광고하는 많은 경우가 결국 교회와 교인 매매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2001 8 2에는 이런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몇 사람의 젊은 목사 부부가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그 중 한 목사의 부인이 그들의 내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집단구타를 당해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해도 충격적인 일인데 그들은 그렇게 해놓고 시체를 80여일 동안 방치한 가운데 매일 기도(?)를 하고 믿음의 일기(?)를 쓰면서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입니까? 일반인도 아니고 평범한 교인도 아니고 소위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다하자면 끝이 없으니 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들이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 뿐입니까? 최근에 부유층 자녀들이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약을 복용하다가 적발되어 사회문제화 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유명한 목사님 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돈이 얼마나 많기에 어린 아들에게 외제차를 사주며, 용돈을 얼마나 많이 주기에 마약을 복용하도록 했습니까? 도대체 그 목사님은 누구를 믿는 목사님입니까?

그밖에도 부동산 투기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목사님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1996년도에 어떤 교계 신문에서는 『한국교회, 그 문제의 현장집중 취재』라는 기획 기사를 매주 연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은 불신자들이 볼까 봐 겁이 날 정도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사례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의 성 윤리 타락이나 목회자들의 성추행 및 성 추문 기사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그런 목사들을 여전히 추종하고 있다는데 더 놀라움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재주가 얼마나 좋으면 성 추문이 있거나 도박을 했거나 사기를 했거나 상관없이 교인들로 하여금 주의 종(?)이라고 맹신하고 따르게 만들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뛰어나고 유능한 분들이 마땅히 할 말을 해야 할 때는 왜 아무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해서, 사회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 박힌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세례 요한처럼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종교계 안의 위선과 죄악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경고를 발해야 하며, 특히 기독교계 자체 안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도 과감히 잘못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긋난 것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책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같이 부패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두려워서 그렇습니까?

얼마 전 천주교의 높은 분이 유학자의 묘소에 가서 큰 절을 두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돌아가신 분께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국의 목회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분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그 행위를 미화하고 칭송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의분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그렇게 짓밟혀도 된단 말입니까? 어떻게 죽은 자에게 제사하고 경배하는 것이 합리화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란다구요? 그런 일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노략질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분은 또 위의 그 철학 강사가 출연하는 TV에 나와서 공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다고 했습니다. !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의 언행일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시여 공의대로 판단 하시옵소서! 한국에서 대학 교수도 하고 대학 교목도 하다가 미국으로 간 어떤 연로한 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가 타 종교와 공존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사도행전 4 12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러면서 그 분은 베드로가 문맹에 가까운 어부였고 당시 세계 다른 종교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으며, 연구도 못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간증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종교전이 일어나서 인류의 종말을 재촉할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 다른 종교의 구원을 인정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4 12절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신 말씀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사님은 기독교를 위해서 기독교 죄악을 고발한다는 전제하에 무분별한 잣대로 정죄하고 칼빈이나 존 낙스 조차도 구원받지 않은 것처럼 매도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 목사님의 구원이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분이 신학교 교수를 했고 목사 일을 했으니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을 칠 일입니다. 또 그런 분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외국에서 신학대학원까지 나와 목회까지 했다는 어떤 사람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불타, 도교의 도를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하고 심판하는 동일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 글에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하면서 그런 기독교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기독교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 신앙관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으며, 그런 사상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사람들이 흔히 발하는 대로 산꼭대기의 목표는 같은데 올라가는 길은 각기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길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몰라도 성자이거나 인류에 기여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말하고, 선량하고 인자하면 유교인이거나 불교인이거나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하여 꾸며낸 궤설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생명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가진 사람밖에 낳을 수 없고, 양은 양의 생명을 가진 양 밖에 낳을 수 없으며, 원숭이는 원숭이의 생명을 가진 원숭이밖에 낳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과연 독선이며 배타적인 것입니까? 아마 그들은 적당히 타협해서 원숭이도 노력하면 양의 새끼를 낳을 수 있고 양도 노력하면 원숭이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해야 독선적이 아니고 배타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까지 그런 착각을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불렸던 주일학교 찬송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재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어여뻐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그들은 위대한 설교자요 작사, 작곡자였던 로버트 로우리의 다음과 같은 찬송도 전혀 불러보지 않은 것일까요?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찬송가 343)

얼마나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입니까? 이와 같이 천국은 믿음을 통해서 천국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영원한 생명 또는 거듭난 생명이라고 합니다.

구원도 단순히 악인이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육신의 생명만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물론 구원받으면 누구보다도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고 의로운 자가 되지만).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생명의 문제가 구원과 믿음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3:3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6:4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48).

내가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1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1,2).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따라서 인간의 선이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의 전철을 다시 밟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선악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했고, 악을 이길 힘이 없으면서 악에 자신을 노출시켰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아시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생명에는 무지하면서 선악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들이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기만 하면 천국에 갈 것처럼 착각하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오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선량함이나 인자함이나 의로움은 과연 어떤 수준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14:3)고 하셨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2:16)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143:2)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 25:5,6).

이런 인간들이 행하는 선이나 의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과연 어떤 수준일까요?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뿐이니라( 35:7,8).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4:6).

만약 사람이 자신의 선이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내려 오셨으며,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만 했겠습니까? 그저 아무 종교나 진실하게 믿으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의롭게 살거나 선하게 살므로 인류에 기여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선한 행위)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그렇기 때문에 위의 사람들은 아주 기본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착각 혹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전을 혼동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인간의 고난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온갖 노력을 다 경주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애쓰는 행위이며, 기독교의 신앙은 인간이 그렇게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것을 믿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5 31~46절에 있는 말씀을 구원과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의 비판한 내용의 많은 부분은 사실일지라도 그의 신앙관은 결코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그는 신학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인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하거나 그런 신앙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흔히 있었던 풍습이고 우리 고전인 심청전에도 나온다. 오늘날의 정치나 법률보다 훨씬 무서운 고대사회의 인습이라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 족장 아브라함은 꼼짝 못하고 그같은 풍습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목사님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신학교에서 설화에 대해 배웠을지라도 현직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인식하고 또 그것을 공개적인 글로 발표했다는데 대해서 놀라움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신학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의 반발은 자유지만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는 사실과 이 믿음이 결코 다른 종교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한 영혼으로서 사랑합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옳고 그름은 분별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폭력을 쓰거나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행한 종교 전쟁이나 억압 등 잔인한 일들은 정상적인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죄사함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도 성경도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본도 전부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종교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신학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변합니다. 그 변하는 신학의 잣대로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말씀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그런 신학을 배운 사람들 중 다수가 그 신학을 최고의 가치인양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신학은 사단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지혜로운 악마를 만들어 내며, 무식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가 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느냐 나타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 또는 기독교의 근본진리인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 구원, 부활, 삼위 일체 등을 부정하는 신학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이 어떻게 하나님의 종을 길러내겠습니까?

조직신학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전 어떤 세미나에 참석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은 복음적이고 저서도 많이 낸 분으로서 그 때 당시 현직 신학교 교수이면서 개척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신학생 중 약 3%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하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어떻게 하면 빨리 학위를 따고 큰 교회를 세워 목회에 성공하느냐 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신학생들이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심정으로 목회하겠다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3:1)고 했는데도 오늘의 현실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교계 신문에 목사 고시에서 컨닝하는 사람이 40%가 넘은 적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목사님들이 성경의 권위를 믿고 그 말씀대로 목회를 한다면 교회나 목사님들이 언론의 비판이나 가십거리에 등장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목사님들이 성경의 진리만을 전하면서 본을 보인다면 교회가 세속화되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목사님들이여! 정치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그 정치의 희생물이 되셨습니다. 부귀와 명예를 좋아하는 목사님들이여! 주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9:58)라고 하신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세상에서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목사님들이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목소리를 거룩하게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삶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까운으로 성직자임을 나타내 보이려 하지 말고 인격으로 하나님의 종임을 보이십시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21).

예수님께서도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에스라가 왜 훌륭한 학사 겸 제사장이었습니까?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7:10)

목사님들이 이런 성경의 교훈들에 주목하신다면 교회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교인들이 얼마나 변화되겠습니까?

외국으로 1년에 휴가를 몇 번씩이나 가시는 목사님들은 한 번으로 줄이시고, 고급 주택에 사시는 목사님들은 한 단계 낮은 주택으로 줄이시며, 고급 차를 선호하시는 목사님들도 한 단계 낮은 차량으로 바꾸시면 어떨까요?

1부에서 몇 부 예배까지 드리는 대형 교회를 선호하시는 목사님들, 그래서 예배당을 더 크게 지으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고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님들은 한 번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만족하시면 어떨까요?

한 번 만나서 상담하기가 장관 만나기 보다 힘든 그런 지체 높은 목사님이 되지 마시고, 찾아오기 전에 친히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 같은 그렇게 가깝고 친근한 목사님이 되시면 어떨까요?

자기만 성도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말고 성도들이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그런 겸손한 목사님이 되시면 어떨까요?

영광스런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셨습니까?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2:11).

사랑하는 목사님들이여! 성경 좀 믿읍시다. 신학적으로 믿지 마시고 이론적으로 믿지 마시고 지식적으로 믿지 마시고 능력으로 믿으시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말 믿으신다면 사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 앞에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셔서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십시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만 자랑하십니까?(3:3). 고난 받으신 주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기꺼이 나갈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정말 목회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고 계십니까? 그 사랑 때문에 말씀도 전하고, 그 사랑 때문에 심방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함께 웃고 함께 울기도 하며, 그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기도하고 섬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목사님들이여! 성경을 믿고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물질만 탐하는 기복신앙의 기독교인들을 양산해 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교회에 나와서는 교인이지만 밖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적인 교인들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새벽기도는 열심이지만 부모나 시부모 봉양에는 열심이 없는 그런 교인들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못하는, 적당히 타협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교인들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기독교적인 것과 기독교, 교회적인 것과 참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 못하는 그런 교인들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보다 현세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그런 교인들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외형적인 숫자와 건물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그런 목사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계할 때가 있고( 25:19) 셈을 할 때가 있다는 것(16:2)을 망각하는 그런 목사님이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목회를 하신다면 목사보다 박사를 더 좋아하고, 목사보다 사장을 더 좋아하는 그런 목사님이 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양 무리를 좋은 꼴로 먹이지 않고 자기 배만 살찌우는( 34:1~16) 그런 목사님이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전도출판사 -기독교인들은 과연 예수를 믿는가-정선지음 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