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자연 세계와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에 고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만 인간은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다른 것들, 또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혼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은 혼자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이 능력은 고독감을 더욱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삽니다.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며 이 고통스러운 느낌을 피하려고 늘 애씁니다.
이 사실에 특히 민감한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들 중 어떤 젊은이들은 들에 박힌 성인 사회에 반항하는 소리를 지릅니다. 성인들은 독창성의 생득권을 더 번창하는 순응이라는 것에 팔아버린 “발뺌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항은 그들에게 새로 생겨난 고독감 중에서 그 고통의 일부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책임과, 자유가 갖다 주는 고독감을 묵살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납게 추구하는 독립이란 것이 성인과 젊은이가 고독감을 완화시키려고 똑같이 찾는 또 하나의 “발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고독감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계획에 휩싸여 매우 바쁘게 지냄으로써 자기 자신과 혼자만 있는 시간을 피하려 합니다. 그들은 추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리는 어린이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애착하여 결국 그들을 소유욕으로 숨막히게 만듭니다. 그 결과 성공하지 못하는 일련의 오랜 관계가 이루어지며 결국에 가서는 동일한 고독감을 회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또 약물과 술로 신체의 화학 변화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약물과 술은 그저 뇌를 마비시킬 뿐이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짐승의 수준까지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 화학 약품들의 효과가 없어지면 고독감도 다시 돌아옵니다.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또 고독을 다루는 일에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들에게 효과가 없으므로 그들은 어떤 특별한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보다 자신의 고독을 더 깊이 느낍니다. 활동 불능케 만드는 이 고독감의 결과는 너무 파괴적이기 때문에 이것의 희생자들은 그들의 “점착성(adhesiveness)을 잃어버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채 혼자서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시도하다가 마침내 오직 자기 자신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 관계도, 정신을 다루는 어떤 인간 관계도, 정신을 다루는 어떤 교묘한 기술도,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의 몸짓을 파괴하는 일에 너무 능란해 집니다. 그들은 말을 하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게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독은 우주의 익살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불편한 정신적 장애 속에서 허위적거리게 하셨을까요? 인간의 존재라는 이 끔찍한 면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은 동정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주된 성격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인간을 그처럼 고독하게 만드셨을까요?
그분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신 후에 이브를 동반자로 만드시고 원래의 상태에서는 그들과 직접 교통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반역을 함으로써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그 처음 범죄한 날로부터 고독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고독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고독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변화와 부패와 궁극적인 분해의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달리 고독감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핀치 못한 이 인식은 인간을 철학적 사색으로 내몰아 갑니다(만약인간에게 이 고독감이 없었다면 철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실까요?
그분은 인간과 교통하려 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인간의 마지막 운명은 어찌될까요?
결국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창조, 반역, 그리고 가장 중요한 회복을 말하는 기독교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자체가 동력이 되어 이것으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고 인간의 고독을 영원히 끝마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과 고독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격의 기본 구조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은 성령님과 결합됩니다. 마음 속의 부패한 독백은 활기 있는 대화로 바뀝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고독을 체험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고독은 측량할 수 없는 차원에 속해 있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뻣뻣한 그림자는 우리가 결코 온전히는 알 수 없는 고독과 사랑을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독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고독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아마 여러분은 고독을 처리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시도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생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은 보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198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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