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된교회와 지역교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시편 19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디도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에베소서 3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이는 창조를 말합니다. 디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속한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정사와 권세는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1장에서 주님이 정사와 권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이 말씀을 볼 때 정사와 권세는 천사들을 의미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도 정사와 권세가 나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여기서 정사와 권세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정사와 권세들, 즉 거룩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들이 다 교회를 보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 19편은 하늘에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나타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보면서 인간은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천하고 작은 자 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디도서 2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같은 은혜를 주셨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생각하게 될 때 천사들이 살펴보고 있다고 하는 점을 마음 속 깊이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누구에게 전하는 것입니까?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립니다만 이 때 주의 죽으심이 누구에게 전달됩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억할 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이 교회를 살펴보고 있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일 때 자매님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천사들을 인해서입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나의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이제 사단에게 “교회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우리는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교회를 보면서 “그들도 순종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임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본(식양)과 그림자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본문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대제사장”은 주님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제단에서 지성소까지 간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늘에 있는 참 성소와 비교됩니다. 이 땅에 있는 성막이 물질적이라면 하늘에 있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과 제사장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5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히
먼저 “본”(식양)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인 40장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8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그렇게 반복하고 있을까요? 자녀들은 부모님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엄마, 그 말은 아까도 했잖아요” 하고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은 말을 자주 잊어먹는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식양을 따라 짓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꾸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우리 마음에 ‘아, 이건 이렇게 만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댄데 ...’
교회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개선하려는 이런 저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올바로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말씀을 내 마음대로 변경한 게 있다면 그 때 진정 후회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막에서, 문이 나오고 문을 들어가면 제단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 순서를 바꿔서 제단을 먼저 놓고 문을 다음에 세우면 안 됩니다. 문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이를 안 사람만이 제단에 가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막의 구조상, 물두멍 다음에 성소가 있습니다. 이는 손을 먼저 씻어야 성소에 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말합니다. “먼저 깨끗하게 씻고 그 다음에 제단으로 가라” 그러나 하나님의 순서는 제단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물두멍입니다. 이는 신약을 읽으면 매우 분명해집니다.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을 씻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계속 깨끗하게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식양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막의 모든 널판은 수직으로 서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건축의 경우와 다릅니다. 집을 지을 때 보통은 널판을 가로로 쌓아서 짓습니다. 그러나 성막에서 이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는 등대를 함께 둘러서기 위해서입니다. 성막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가지신 것과 충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관해 말씀하신 것도 변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막에 관한 진리는 신약의 히브리서에 다시 나올 뿐 아니라 하늘에 참 성막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이 말해줍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물두멍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 제단이 나오고 제사장이 향로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나옵니다. 성막은 본과 비유와 그림자입니다. 본은 우리가 따라가야 되는, 복사해야 되는 대상입니다. 비유는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물의 모양을 말해줍니다.
성막은 본체의 그림자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태양광선이 들어오고 있는데 창가에서 손을 대면 바닥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손 모양을 말하고 있는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만일 엄지손가락을 구부리면 그림자는 엄지손가락이 없는 모양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림자만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엄지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쪽 손의 엄지를 더 붙인 모양을 만들면 “아 이 사람은 육손이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림자만 볼 때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3:10절에서 교회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천사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만 봅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기독교계, 많은 교파를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잘못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사람들을 향해 나타내느냐 하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지역모임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나타내야 합니다.
모임 안에 개선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개선하고자 했던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바꿀 권리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때는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느냐?”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과 같이, 어느 날 그 속에 담긴 진리를 다 이해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과거를 돌이켜보고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과 모형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몸된교회와 지역교회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서 교회에 대한 위대한 두 진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6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를 건축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시제는 미래입니다. 주님은 오순절을 가리키고 계셨습니다. “내 교회”는 교회가 주님께만 속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교회를 만들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기의 교회는 몸된교회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교회에 말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지역모임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115번 나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불리어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그 중 15번은 몸된교회고 나머지 대부분이 지역모임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여전히 땅에 있고 교회의 미래는 하늘에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레위기 23장에서 예언된 오순절의 의미가 성취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13절).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는 유대인의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에 있는 성도들이 여기에 들어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성도가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한 교회요 한 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네 그룹들, 문화적, 전통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여정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시는 휴거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을 보면 유대교로부터 부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무리를 보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13 절).
신약성경은 교회에게 번영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면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을 말합니다. “능욕을 저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영광을 돌리든지 아니면 불순종하여 주님을 욕되게 하는 기로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은 교회가 이방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주님 앞으로 나오는 모습이 나옵니다. 계시록 18장을 보면 마지막 때에 새롭게 형성되어 일어나게 될 종교적인 집단인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분리되어 나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 들을 받지 말라”
이는 환난시대에 일어날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대교와 이방인 그리고 기독교계 세 가지가 합쳐서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적 요소가 우리 주변에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성별되어 주님께 나아갑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집단과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 모든 것들의 혼합물입니다. 종교계는 이같은 수많은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은혜의 체계를 말하지만 사실은 율법적인 행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유리창에 아름답게 장식한 것들, 또는 촛불들, 제단들, 거룩한 물(성수)등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이 아닌 구약이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나 실상은 구약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혼란으로부터 떠날 것을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만 따르는 자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몸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모임입니다. 세상은 “저 언덕 위에 있는 이름다운 교회”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건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어떤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건물 혹은 종교적인 기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미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또한 “이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 19)라는 말씀도 보게 됩니다.
신약 교회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우리 영혼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거듭남으로 인해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결코 파괴되거나 멸망하지 않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역사는 세기를 걸쳐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순간 이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몸의 지체가 되기 위해 침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몸된교회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아무도 거기에서 밖으로 끌어 낼 수 없습니다. 결코 파괴되지 않습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 즉 지역모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모이는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간증을 나타내십니다. 이 지역모임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주신 본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지역모임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은 지역모임을 반대합니다. 사단도 반대합니다. 슬프게도 지역모임 안에 있는 자들이 지역모임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몸된교회는 모든 믿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미 주님께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임이 하늘에 있는 교회와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몸된교회는 오순절에서 휴거 때까지 믿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휴거 후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휴거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오실 수 있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지역모임은 사도행전 2장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당한 교회입니다. 핍박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유대로 나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모임이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의 전도활동의 중심지가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보게 됩니다.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18장에서는 고린도 교회, 19장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보게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계속적으로 지역모임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역모임에는 본이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 국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이방 세상의 수도인 로마로 퍼져갔습니다. 주님과 사도로부터 시작되었고 베드로가 시작해서 사도 바울로 옮겨집니다.
사도행전은 전환기의 책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죽었다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유대에 있는 교회”, “아시아에 있는 교회”도 나옵니다. 어떤 지방에 있는 지역교회들을 말할 때는 항상 복수형으로 씁니다. 교회가 단수로 사용될 때는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을 총괄해서 말할 때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계속해서 전파될 때 하나님의 간증이 다른 도시 다른 지방으로 계속 전파됩니다.
오늘날 한국, 캐나다, 말레이시아, 미국 등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두신 이 간증을 드러내는 빛나는 수천의 등대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등대가 하나님의 진리를 환히 드러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천사들이 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 진리들을 알고 이를 따르려는 소원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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