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플레니건
레위기의 제물에 관해 연구한 것을 후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은 연로한 신자들이 레위기의 시작하는 장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쁨과 첫 감격을 기억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이정표가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러한 고대 성경을 읽는 젊은 신자를 대부분 부러워할 것입니다. 이들 제물에서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어떠한 설득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부를 질문 받는다면 확실히 그러한 권위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 중 두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가시는 중에 특별히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에서 실제로 자신이 발견되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성경에 자신에 관한 것들이 있음을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나중에 시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눅 24:27,44). 히브리서는 성막과 제물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의 상징들을 많이 언급합니다(히 8:1-5; 9:1-9; 10:1-9). 이것들은 우리 주 예수님의 완성이요 실체가 되는 모형, 상징, 모본과 그림자이었습니다. 누구라도 레위기를 신약의 신자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오래된 유대의 의식과 규례의 기록으로만 여겨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레위기의 처음 7개 장들에서 5개의 주요 제물들이 요약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처음 언급되는 순서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중에 상고하게 될 매우 중요한 이유 때문에 번제가 먼저 언급되고, 소제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화목제, 마지막으로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조 제물이라 불리는 전제와 같은 다른 제물이 있으며, 이러한 음료 제물인 적은 량의 포도주를 희생물이나 소제에 부어야 했습니다(출 29:40; 레 23:18; 민 15:5,7). 그 다음에는 느헤미야 10:34, 13:31에서만 언급된 보다 덜 알려진 목제 제물이 있는데 그것은 꺼지지 않는 제단 불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했습니다(레 6:12-13).
각 제물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그것들은 주 예수님의 인격, 사역, 직분, 완전성에 대해 각각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복음서도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차이점이 있는 헌물들도 결합하여 그분의 삶과 성품의 사랑스러움과 그분의 고난과 죽음의 경이 안에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완전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상황에 갈아입은 옷으로 사진에 찍힌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한 때는 정장 드레스로, 그리고 다른 때는 평상복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시, 육체 노동에 관여된 작업복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자면 집에서 자신이 애용하는 의자에서 편안하게 휴식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묘사를 다양하게, 얼마나 아주 다르게 각각의 사진에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는 항상 동일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림은 우리에게 그분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하는 일에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복음서와 함께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하지만 항상 그리스도의 상징성이 일관되게 풍부합니다!
번제는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가죽을 제외하고 큰 제단에서 완전히 소화(燒火)했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했던 외부 덮개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차지했습니다. 제물은 달콤한 향기로 올라갔고 그 제물은 “올라가는 제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자의 최고의 감사를 나타내므로 아마도 그것이 먼저 나타나야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성막의 건축에 대한 명령을 주셨을 때 그분은 지성소에서 시작하여 거기로부터 다른 재료들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분은 자신만을 위한 제물 중의 높은 배경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제사장들과 그분의 백성들 몫으로 허락된 다른 제물들로 진행하십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로 준비하여 다양한 형태로 봉헌되는 피 없는 제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향기롭게 사셨던 구주의 삶에 도덕적인 영광을 유쾌하게 예시하는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소제물에는 속죄에 관한 사고(思考)가 없습니다. 동시에 고난의 상징은 있지만 피를 흘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만족을 가져오는 끊임없는 거룩함과 순결함에서 흠 없는 삶을 사셨던 상징입니다. 그러나 이 제물에서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몫을 갖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성도들이 제사장 특권으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키셨던 분을 흡족히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화목제는 이전 제물들처럼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그것은 헌신적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드려졌던 자원하는 제물이었고 그것은 제단을 위한 몫, 제사장 가족을 위한 몫,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화목제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교제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주로 무지의 죄, 즉 의도하지 않게 범해진 죄들이었으며 사람이 죄를 지은 줄도 모르고 범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 상태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복잡한 율법의 규칙과 규정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범하기가 매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의 죄들이라도 죄를 진 것이기에 제물과 피를 흘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갈보리는 우리를 위해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속건제는 고의로 저지른 죄들이며 이웃에 대한 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거스르는 죄들입니다. 이것들도 역시 제물을 요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신자에게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으신” 것을 자각하며 기뻐합니다(계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