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이름으로 모임
만약 우리가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과 관련된 진리에 대해서 이해하는데도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 진리는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가장 놀라운 말씀 가운데 하나인 다음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이 부분과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최초로 언급되는 것을 봅니다. 16장에 있는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 전체로서의 교회(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키고 18장에 있는 “교회에 말하고”라는 말씀은 지역교회(징계의 문제에 있어서 권위를 행사하는 지역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에서 우리는 우주적인 교회(총체적인 교회)와 지역교회들(성도들의 지역적인 모임들)의 개념 구분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이 구조의 기초석이 세 단어(우리말로는 두 단어-역자주)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며 이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그분의 백성의 지역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와 축복은 그분의 이름이 주어진 장소에 따라 조건적입니다. 사실 그분의 이름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지역교회들이 어떻게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의 교회가 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생기기 오래 전에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30:24)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분의 백성의 집단적인 간증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은 항상 그분의 이름이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그들이 삼가야 할 율례와 규례”의 최초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신’ 곳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신
이러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 18장 20절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 담겨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그분의 백성을 갖고 계시고, 그들의 거룩한 모임을 위하여 그분은 오늘도 여전히 택하신 장소와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만약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함께 모이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와 이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나 사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교회의 교제 안에서 함께 모일 때의 원리를 선택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신” 곳에서 예배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염두에 두셨던 것은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질서와 규칙을 따르는 지역교회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려고 택하신” 곳에 모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이름에 대하여 얼마나 큰 중요성과 대단한 의미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이름은 모이게 하는 이름이다.
성도들은 단순히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올바로 모이는 것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분당의 이름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그분의 이름은 하나 되게 하는 이름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즉 하나의 살아있는 연합체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gather) 곳”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지는(are gathered) 곳”임을 주의하십시오(우리말 성경에는 능동형 ‘모이는’으로 되어 있으나 흠정역 영어성경에는 수동형 ‘모여지는(are gathered)이라고 되어 있음-역자주). 우리 자신들을 함께 모으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함께 모임”은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역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과 말씀에 대한 증인들로서 주 예수님 주위에 우리를 모으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의 모본을 따르는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이러한 지역교회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영적인 은사를 주어 하나님의 진리를 알리는 일에 있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영역이 됩니다.
그분의 이름은 다스리는 이름이다.
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였던 곳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지시와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모여지는) 것은 그분의 권위와 통제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너무 자주 간과되고 있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그들의 교회집회에서 그분의 규례를 제쳐놓고 그분의 명령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의 권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인간의 제도로 대치되어 있다면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신약성경의 모본을 따르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성도에 대하여 “너희 선생(Master)은 하나 곧 그리스도요”(마
그분의 이름은 교제하는 이름이다.
그분의 이름은 예식주의(ritualism)의 “육적인 규례”를 파기하고 대체하며, 우리가 단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상징적으로나 예식적으로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호화로움과 유대교의 예식은 영원히 파기되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런 날이 동터오자
예식과 의식은 사라졌도다.
하나님의 교회는 비세속적인 단순함이 그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거대하며 고도로 체계화된 종교조직과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진리가 지상의 성소에 있는 가장 장엄한 예식과 기념물보다 더 단순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데 얼마나 느린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의 거룩함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 함께 모일 때 주님의 임재를 알려 한다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조건과 상태가 필요합니다. 외적인 정확함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내적인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이름의 거룩함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이름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그분을 구별하는 표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의도된 대로 지역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핵심적인 특징을 제공하는 이름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를 향해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게이한(C. Ga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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