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하는 것은 새로운 것일까요?
우리가 1인 목회를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것일까요?
“바울이····장로 들을 청하니····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벧전
우리가 “1인 목회”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도맡은 “목사”나 “감독”등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적당한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용되어서 교회에서 사역하며, 교회에 있는 동안 엄숙한 대변인이 됩니다” 이 제목에 관한 신약 성서를 상고해 보면, 오늘날 1인 목회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사도들이 행한 바는 상이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제목의 서두에 인용한 말씀과 같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그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경고했습니다.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행
여기서도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악한 것을 허용했을 때, 바울은 단지 “목사”를 꾸중하지 않고 이 일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을 꾸중하기 위하여 고린도서를 하나님의 교회에게 보낸 사실을 주의해 보십시오. 바울은 서신의 수신인을 “교회의 사역자”라 한적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성령님의 마음은 1인에게 목사, 전도자, 그리고 교사의 기능을 위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과 교사들은 각 교회안에 여러 명이며 이 은사는 성직의 생활과 완전히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신서를 통해 그리스도인 모임 안에서 많은 목자 혹은 전도자 혹은 교사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바라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으며, 양무리 가운데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양무리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이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위해 손수 일했을 것입니다(행
하나님이 세우신 성도가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사역하는 것이 새로운 것일까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이것은 앞장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진리입니다. 사도 시대에는 교회에서 두 세 사람이 한사람씩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각인에게 주어지며 이러한 은사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앞장에서 강조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은사들은 성직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굴라는 천막을 만들었지만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친 교사였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지만 빌립보에서 바울의 곁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인 목회는 교회 안의 은사를 약화시킵니다. 고용된 교사는 그의 봉급을 타기 위하여 그럴듯한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역교회 안에서 은사를 격려받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전하든 말씀을 가르치든 그 자신의 사역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절하게 이러한 사역을 하는 교회들은 교사를 고용하므로 소요되는 비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금 상고하는 바와는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사역의 자유를 유지하기 원한다면, 은사 사용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물리쳐야 하며, 초대교회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2명도 넘는 사람들이 목자, 전도자, 혹은 교사의 은사를 활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영혼들이 더해지는 축복을 받는 그러한 모임들을 수백개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재정적인 방법이 새로운 것일까요?
“매주일 첫날에 너희가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우리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제쳐놓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재정을 모으기 위해 바자회, 자선경매, 요리책 세일, 가두 모금등의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에서 어떤 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백성들에 의해 유지되어야만 하고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헌금할 때 십일조를 내는 조직이나 원칙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원함으로” 십일조를 낼 수 있고, 또한 더 이상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꼭 내야 하는 비율이나 방법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종종 월급 받는 전도자에 의해 개인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조직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공적으로 강요되고 잘못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 제목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그 마음에 정한대로” “이(利)를 얻은대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심”에 따라서 “얻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고, 그들의 즐거운 헌금은 유대 율법의 요구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의 특권은 모세의 율법의 요구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주님께 헌금할 때 종의 관계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원칙이 우리의 모임 안에서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러한 것은 사도 시대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며,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씀 드립니다.
하나의 간청
우리가 새로운 것을 전파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귀하께서 깨닫고 순종하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작고 인기가 없을지라도 이러한 진리를 지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그들과 함께 모이십시오. 당신이 비성서적인 곳에서 모이고 계시다면 악한 것을 떨쳐 버리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행할 수 없다면 당신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나오십시오. 이 길이 축복받는 길입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N. M. 프레이져
'교회진리 > 지역모임의 실행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신약교회 (0) | 2008.12.05 |
---|---|
예배는 사람의 계획으로 드릴 수 없다 (0) | 2008.12.05 |
주님의 이름으로 모임 (0) | 2008.11.16 |
제사장 (0) | 2008.11.03 |
우리가 전하는 것은 새로운 것일까요? (0) | 2008.10.21 |
요시야와 부흥 (0) | 2008.10.14 |
지역교회의 특권과 의무 (0) | 2008.09.26 |
모든 믿는 이는 제사장이다 (0) | 2008.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