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와 부흥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그로 인한 꾸준한 인내에 대해서 유다왕 요시야를 능가할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부터 우리는 모든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에서 한 다음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요시야가 한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맡겨진 일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 눈에 보기에 모든 가증한 것들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도록 보내진 것이 아니라 멸망하는 죄인의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포하도록 보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요시야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자신의 작은 나라에 제한하지 않았고 휠씬 넘어 나아갔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출생한 나라를 넘은 지역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이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그 필요가 절실하며 시시각각으로 영원한 파멸로 떨어지는 많은 영혼들이 살고 있는 많은 땅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역에만 거듭하여 가려고 합니까? 사도 바울에게서 보이는 개척자 정신을 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친숙한 '세상' 이란 무슨 뜻인지 물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중국은 한국과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 드넓은 땅에 미신과 무신론 사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친애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나 그 중국 국민들의 필요에 대해 채우고 있습니까?
요시야의 열정은 또 다른 열심 있는 왕 님시의 아들 예후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 두 왕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각자는 바알 숭배와 다른 끔찍한 일들을 파괴할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받았지만 그 두 사람의 동기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요시야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요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주변을 둘러싼 많은 악들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인 그는 곧바로 그같은 악을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후에게서 상당히 육신적인 활동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함으로 보다 큰 위치를 차지할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예후의 마음은 하나님과 결코 바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 바알 숭배가 백성들 사이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후는 그것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왕하
요시야의 통치에 대해 성령께서 두 가지 설명을 해주는 것을 독자들은 인식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서로 비교할 때, 어떤 차이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역대기의 기록은 예루살렘에서 가졌던 요시야의 유명한 유월절에 대해 언급하는 반면에 열왕기서는 그것을 아주 짧게 소개하고, 열왕기서는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그 땅에 있는 우상숭배를 열정적으로 없앤 것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만 역대기서는 거의 주목되지 않습니다.
열왕기서에서 우리의 현재 목적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대하 34:8)하기 전에 성전을 정화했음을 보지만 열왕기하 23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하나님의 전에 있는 이 끔찍한 목록이 여전히 있었던 것을 보면 첫 번째 정화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보게 되지만 두번째 정화시에는 모든 악한 것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왜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더 철저했을까요? 그 두 사이에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그동안 오래도록 참아왔던 모든 끔찍한 일들이 그 왕에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율법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이해를 가졌고, 온 마음으로 그것을 지키고자 했습니다(시 119:34). 요시야는 다윗과 더불어 이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시 119:111-112).
마음이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향할 때 열정적인 행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 119:60). 오늘날 어떤 신자들은 이러한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의하지 많으므로 비성경적인 연합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유의하지 않음으로 더욱 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착념할 때 하나님은 성도들이 즉시에 행동으로 옮기기 원하십니다. 레위기 5장은 이 원리를 명백히 제시합니다.
요시야가 믿음 가운데 그 일을 착수한 것은 엄청나며, 비록 유다와 베냐민만 통치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든 우상의 그림자마저도 파괴하기까지 그는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먼저 정결케 되었습니다.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왕하
‘묘지'는 아세라 상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그곳에 있겠다고 했던 성전에 그같은 끔찍한 우상이 설치되어 있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대하
요시야의 활동에 대한 성령의 기록 예루살렘 안과 근처에 세워졌던 다윗 왕가의 선조들이 끔찍하게 쌓아놓았던 것들을 특히 언급합니다. “또 유다 열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시종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수레를 불사르고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 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왕하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는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하나님의 본래의 거룩한 율법이 쓰레기 아래에 덮여 있었기에 그것의 발견은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은 한층 더 심각한 악이었고, 결과적으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초래한 악들과 조상으로부터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인 악들이 만일 우리가 성경을 더 가까이하였다면, 우리 영혼에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두었다면 심판받고 버려졌을 것입니다. ‘연합' 이라고 하는 짧은 부분이 점차 증가했던 것이 만일 성경을 연구했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버려졌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주의 깊게 연구되고 각 책으로부터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할 뿐 아니라 각 책이 또한 다른 성경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하나의 전체적인 말씀으로 살펴져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교훈과 기쁨을 위하여 주신 거룩한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통하여 이 땅과 천국에 이르는 은혜와 영광스런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했던 요시야는 어떤 죄악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것에 비교해 작은 악으로 간주하고 처리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땅에 가득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산당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명백히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위한 예배 처소로 세운 것입니다. 독자들은
열정적인 요시야는 모든 산당을 제거했고, 그 위에 향을 살랐던 모든 제사장들을 좇아냈고,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기에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직무를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산당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왕하
W.W. 페러데이
전도출판사 월간 횃불 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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