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성경적인 교회가 가능한가?
바인(W. E. Vine)
성경의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바울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라는 말이 성경이 완전하며 최종적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으며 디모데에게도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어면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딤전
고린도전서에 들어있는 영원한 요구사항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지역교회의 행동과 예배 그리고 간증에 대한 어떤 내용들을 그저 고린도 교회에만 국한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는 그 교회에만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도 보내진 것입니다(고전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사항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좇는 모든 성도들의 의무라는 것을 나타내기에 충분합니다. 초기 속사도 시대 이후 변절한 기독교계를 통해 널리 퍼졌던 다양한 방법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성경의 요구사항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성경적인 방법을 따라 모일 수 있었습니다.
변절과 부적절한 회복
변절의 역사를 기록하거나(이러한 변절에 의해 교황제도가 지배적으로 확립되었음), 개신교 종교개혁의 불완전한 성격을 기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비록 어떤 나라들에서는 교황제도를 뒤엎는 대단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 제도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을 충분하게 성경의 진리로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분파들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성직제도가 널리 퍼진 채 남아있었고, 세례를 통한 중생이라는 가르침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다른 오류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운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널리 퍼지고, 말씀의 빛이 전해지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지난 19세기 초엽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전개된 운동으로 인해 그들은 인간의 전통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며,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원리들을 따라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어느 한 지역이나 어느 한 중심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다양한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 아래 함께 모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모였으며(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조직이 개입되지 않은 채로 모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성경이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여러나라의 성도들의 무리가 사람의 조직이나 지시로부터 벗어나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도록 성경으로 인도함을 받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가르침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를 주관하거나 성찬식을 집례하도록 위임받은 일인 목회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근거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잔‥‥우리가 떼는 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찬식 규례와 같은 성경에 모순적인 규례도 없고 성직자나 사제에게서 성찬을 받는 것과 같은 의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한 모임 안에서 감독하는 일을 하도록(행
문제에 대한 해답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패와 불완전함과 잘못들이 있다는 것이, 말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폐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야 하며 계시된 주님의 마음에 따라 우리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의 이유를 제공해 줄뿐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름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막아보려는 시도는 오히려 또 다른 폐단을 낳을 뿐입니다. 검정색에 검정색을 칠한다고 해서 결코 흰색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잘못을 따름으로써 어떤 잘못이 교정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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