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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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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성직수임을 금하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2:11-12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정하고 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hypotage) 종용히(hesychia)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authentein)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즉 잠잠함- hesychia).” 교회와 가정에서의 지도적 위치에 관한 문제에서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것은 창조시에 결정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한 것이다(13-15).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eita),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exapatetheisa)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즉 자녀를 낳는 여인 혹은 잠정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든 여인)정절로써(sophrosyne; 이것의 의미는 '바른 판단력', '자제력', '순결', 혹은 '자기 단속')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sozein에서 파생된 sothesetai; 여기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타락시에 사탄의 간교한 유혹에 먼저 넘어감으로써 당하는 불이익과 비난으로부터 여인이 건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얻으리라.” (우리는 여기 sothesetai 를 문맥에서 따로 떼어내어, 해산하는 여인은 새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선행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취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게 있어서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에베소서 2:8-9이 분명히 가르치듯이,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조직된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구조 속에서와 한 세대를 한 팀으로 하는 가정 속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분명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위의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지도하는 책임은 여자가 아닌 남자가 담당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귀중하며( 3:27~28), 남자에게 더 많은 책임이 부여되었다고 해서 남자에게 특권이 주어지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보다도 선천적으로 더 높은 신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1. 여자에게 허용된 것과 남자에게 허용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여자가 남자를(즉 그 회중에서 남자인 동료 신자) 권위있는 방식으로(didaskein authentein은 복합된 개념으로서, 강단에서 회중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장로나 목사의 가르치는 기능을 의미하는 듯하다) 가르치는 것이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으므로, 여자에게는 금지된 것이 남자에게는 허락되었음을 암시하는 셈이다. 이 말을 이리저리 조작하고 개작해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특권과 신분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처럼 만들 수는 없다.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언어의 바른 해석을 거스르는 것이며, 성경을 해석자의 주관적인 욕구에 따라서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신축성 있는 매개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해석은 성경의 객관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행위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2. 반면에 이 구절은 여인들이 사적으로 남자들 개인을 가르치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는다(마치 브리스길라가-자기 남편 아굴라와 더불어-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가르쳤듯이( 18:26)). 또한 이 구절은 여인들이 존경할 만하고 순종적인 태도로(교회 모임에서 여인들이 머리에 쓴 것을 벗지 않는 태도로 상징된(고전 11:5-6)) “예언하는것을 금하지는 않으며, 또한 동료 신자들에게-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고린도전서 14:3예언을 이렇게 정의한다) 말을 하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은사를 가진 여인들에게는 광범위한 기회가 주어졌다. 전도자 빌립의 네 딸도 그와 같이 예언의 카리스마를 받았다( 21:9).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공중 예배 처소에서는 접촉할 수 없고 오직 가정에 찾아가야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인들-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을 찾아가는 데에 앞장 했을 것이다. 가정에서의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의 사도적 정형(pattern)은 빌립보에서 루디아에 의하여 정해졌는데, 그녀는 바울이 유럽에서 첫번째로 얻은 개종자였다. 강가의 세탁하는 곳에서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집에서까지도 루디아는 자기 집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6:14, 40). 또한 그녀는 바울이 자기 집에 있는(실라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동안을 최대로 이용해서 자기 손님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 이와같은 예들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주께서는 은사가 있고 경건한 여인들을 사용해서 영혼을 건지시며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여자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을 가르치는 일까지 행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의 선친 개척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쓰셨던 여자 선교사들의(기혼자와 미혼자 모두) 고귀한 군대가 성경적으로 얼마든지 타당성을 갖는다는 사설을 보여 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정리된 교회의 상황에서 여자 일꾼들은 그들이 아무리 은사와 재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남자보다 우위의 교회적 권위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전히 성경의 명령으로 남는다. 여자들은 교회의 활동에서 보조자가 되어야지, 지역교회의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임직받은 목사의 권위는 가질 수 없다. 디모데전서 2:12은 여인들이 그런 권위를 갖는 것을 명백하게 막고 있으며, 열 두 명의 남자 사도를 부르시며 칠십 명을 보내어 팔레스타인의 성읍들에 복음을 전하게 한 그리스도의 모범은 바로 이런 노선의 권위있는 귀감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다른 어느 남자에게보다도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와 함께 했던 두 명의 여인에게 나타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지라도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귀감은 주목되어야 한다. 비록 바울이 루디아( 16), 뵈뵈( 16:1-2), 유오디아와 순두게( 4:2 -3) 같은 조력자의 도움을 광범위하게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훌륭한 봉사에 대하여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남녀 사이의 이 구별은 지켜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6:2에서 뵈뵈에게 적용된 prostatis라는 말을 대중을 감독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 말이 그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 말은 도우는 자”, “조력자”, 혹은 여성 후원자”, “보호자라는 의미를 가졌다. 심지언 남성형인 prostates도 신약성경의 용례에서는 결코 대표자라는 의미를 갖지는 않았으며, 단지 보호자”, “파수자”, “조력자라는 의미만을 가졌다(cf. Arndt and Gingrich, Greek-English Lexicon, p. 726).)

4. 이 문단에서는 교회 질서에 있어서의 여성의 종속과 가정에 있어서의 자기 남편에 대한 여성의 종속과 분명히 서로 연관되어 있다. 비록 아내가 성경의 교훈과 경건한 생활에 있어서 남편보다 더욱 앞서 있고 더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의 권위에 종속적인 위치를 부여하셨다. 남편은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비록 그가 자기 부인의 신앙 혹은 하나님과의 그녀의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독특한 권위를 찬탈할 수 없지만, 그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에게 결정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 아내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충절을 버리게 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지고의 권위를 무시하려고 하지 않는 한, 남편의 권위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단서가 에베소서 5:22-24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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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 말은 22-24절의 교훈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22절은 어떤 중요한 영역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스스로 복종하며, 아내를 자기가 앞으로 엄격하게 책임 추궁을 당해야 할,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귀한 보화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영역들 가운데에는-배우자에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명백한 언약 이외에도-가사를 꾸려나감에 있어서의 여러 국면들이 있겠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아내의 능력이 자기보다도 뛰어남을 남편은 인정하며, 혹은 아내가 자기보다도 더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남편은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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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에베소서 5:25-33이 요구하는 것은 아내에게보다도 남편에게 훨씬 큰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hypotassesthai, 는 군대나 어떤 팀-전체를 통솔하는 명령의 계통에 따르는-의 특수한 위치에 임명되어 있음을 가리킬 때에 쓰는 말이다) 그를 공경해야”(phobeisthai, 직역하면, 두려워하다)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귀중하고, 교회는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며, 혹은 그리스도를 충분히 공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가 완전과는 거리가 별고, 그리스도에게 참기 위한 많은 인내를 요구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아내의 그것보다도 훨씬 막중한 임무이며 또한 어떠한 남자도 그가 이 장이 제시한 자기의 임무를 확실히 완수할 때까지는 자기 아내를 권고하거나 꾸짖기 위하여 이 장을 인용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가정과 교회의 경영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면-이것은 확실히 그러하다-여자 장로나 여자 집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남성형의 presbyter가 일반적으로 교회적 의미에 있어서의 장로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듯이, 디모데전서 5:2presbyteras(여성 복수 대격)는 여자 장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디모데전서 5:2과 같은 이런 구절에는-이 구절은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를 모두 포함한 동료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적용될 수 없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디모데가 그런 모든 사람을 향하여 늘 취하고 있어야 할 공손한 태도 혹은 형제로서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직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3-6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과부들”(kherai)에 대해서도 동일한 사실이 적용된다. 과부들은 교회의 치리자로서의 그 어떤 신분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은 단지 교회가 구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과부의 부류에 대한 문제로서 모든 과부를 다 구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60세 이상이 되었고, 과부가 될 때까지 한 남편과만 살았으며,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으며, 현재의 행동에 비난할 것이 없으며, 도움을 얻을 만한 자녀나 손자 손녀가 없는 과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남녀와 늙은 남녀가 담당해야 할 역할에 관하여 논하는 디도서 2장의 구절에도 그와 동일한 해석이 적용된다. 3절에서 언급된 presbytidas (여성 복수 대격)는 교회적 의미의 여성 장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presbytidas를 젊은 여자(neas), 젊은남자(neoterous-남성 복수 대격)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특별히 계발해야 할 덕성과 그들이 특별히 피해야 할 악덕을 개괄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presbyterai presbytidas 를 여자 장로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집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적어도 여자 집사를-그들이 남자 집사와 같은 수준에 놓여졌든, 그렇지 않든-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다. 로마서 16:1에서 바울이 뵈뵈를 diakonos로 여긴 것이 분명한 듯하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혹은'집사' -diakonon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아른트와 긴그리치는(Greek-English Lexicon, p. 184) 주저없이 이 구절을 여자 집사의 참된 실례로(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실례) 분류한다. 다른 사람들은 헤르마스의 Vision(2. 4. 3)Similitude(9. 26. 2) (주후 2세기)에 인용되어 있다.

여집사(diakonissa)에 해당하는 교회적 용어는 성경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단 한번 나타나는 이 여성형의 diakonor은 희랍어 성경에서 독특한 것이다. 이 사실은 사도들이 활동하던 교회에 관한 한, 여집사는 비록 허용은 되었을망정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음을 표시하는 듯하다. 사도행전 6:5-6에 언급된 원래의 일곱 집사들은 분명히 전부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회중에 의하여 선출된 이후에 그들은 기도와 안수에 의하여 성직을 위하여 구별되었다.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에 의하여 그런 형식으로 공식적인 성직수임식을 거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만약 바울이 그 용어를 교회적 의미로(“일꾼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사용했다면, 그녀는 집사였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엘리자베스 엘리옷의 훌륭한 논평으로 이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교회와 가정에서의 최고의 권위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자로서의 남자에게 맡겨졌다. 교회에서의 여성(기혼이든 미혼이든)과 가정에서의 아내는 마지못해서 항복하는 태도에서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움으로 하는 복종 속에서 자신을 성취시키는 것이다(“Why l Oppose the Ordination of Women”, Christianity Today 880 (1975):14).

이 동일한 에세이의 보다 앞 부분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관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격을 숭배하는 현대의 사이비 종교는 복종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어떤이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복종한다면 우리는 전인간”(whole persons)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순종이란 얽어매는 것이며, 따라서 나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자유란 억제가 없는 것으로 정의되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성경적 원리와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유는 항상 규제 쪽으로 훨씬 기울어져 있는데, 이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분명히 위계적인(hierarchical) 하나님의 나라에 민주주의적 이상을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권세의 상실과 궁극적인 파멸로 귀결될 뿐이다. 종이요 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는 제한과 얽매임을 스스로 받아들이셨다. 그는 자신을 복종시키며 순종을 배우셨다(ibid, p. 1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