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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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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1. 17:29 삶을 생각하며

위로 받고, 위로 하기

데이빗 리드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위로"라는 말을 접할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느 여름철 그늘에 달아맨 그물 침대 위에 누워 산들 산들 불어오는 미풍을 느끼며, 시원한 레몬 차를 마시는 시원함이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추운 겨울 화롯불 곁에 안락 의자에서 흔들 흔들하는 따뜻함이 느껴지시나요? 이 모두가 듣기 좋은 말임에 틀림이 없지만, 이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말하는 위로와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로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자 하면, 다음의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인명구조대에 의해 간신히 구조된 상황, 백화점에서 엄마 잃은 아이가 몹시 흐느껴 울다가 백화점 안내원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황, 아이를 잃은 비탄에 잠긴 어머니를 목회자가 하나님이 도우실 거라며 위로하고 있는 상황, 피소된 시민이 한 유능한 변호사에 의해 변호를 받고 있는 상황 등등. (요한일서 2:1에서 사용된 "대언자"라는 말과 요한복음 14-16장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말은 주님이 성령님을 가리키고 있는 사실상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위로"라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곁에 있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위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 주님이 장차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실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은 놀랄 일이 못됩니다.

고린도후서 1 3절에서는 우리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엄하고 무심한 보스와 같은 분이 아니라, 오히려 시련의 때에 우리를 돕기 위해 "곁에 계셔서" 동정하시고, 위로하시고, 돕고, 후원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위로는 궁극적으로 그 원천이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환난의 때에 위로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참된 위로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돕기 위해 우리 자신이 "곁에 있어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모든 위로의 원천은 우리 밖에, 즉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고 고백했습니다. 다윗도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의 헛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 4절에서는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한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받는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환난이라는 단어는 "영의 심한 압박과 괴로움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를 침체시키는 모든 것 -환경의 압박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오는 적대감 등- 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때에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약속을 주장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그 일로 인해 이제 그만 둘 때라고 여기겠습니까? 약속을 주장하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 "곁에 오셔서" 도우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비난하고, 여러분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 "곁에 오사" 여러분을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토록 놀라운 특권을 주실 것인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깨끗한 마음으로"(딤후 2:22) 불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상태에 있거나, 혹은 가족에게 화가 나있거나, 또는 친구에 대해 질투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눌려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사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안에서 징계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합당"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운 때를 항상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4절에 있는 이러한 약속의 또다른 아름다운 측면은 하나님이 우리의 받는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이 계속해서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심령이 느끼는 짐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과는 나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압력은 바로 우리의 심령을 압박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들은 사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으로 생기는 것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 가운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셔서 도우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4절의 하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책임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위로를 베푸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있는 사람들 "곁에 가서" 위로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위로 받기만을 위해 위로 받은 것이 아니라, 위로자가 되기 위해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과 난관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통로가 되도록 하신 것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외로울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 "곁에" 있어 주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오셔서 여러 해 동안 깨어졌던 친구와의 우정을 회복하도록 돕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를 필요로 하는 상심한 사람들 곁에 가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을 잃고 상심해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시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제 막 해고를 당한 여러분의 이웃 곁에 가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시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이제 위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떠한 문제나 환난에서 벗어난, 혹은 면제받은 그런 "이상적인 삶"에 대한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뭔가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약간의 긴장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이 속히 "이러한 긴장 관계를 해소해 주십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곁에 와서" 그 아이를 일으켜 줍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위로해주고, 깨끗하게 씻겨주고, 무릎 상처부위에 붕대를 감아줍니다. 이토록 놀라운 아버지의 위로를 경험하는 일은 오직 고통스러운 무릎의 상처를 입는 "시련의 때"를 경험한 아이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약간의 무릎 상처"를 입는 일을 허락하시는데, 이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의 위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진정한 "이상적인 삶"은 위로를 받기보다는 위로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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