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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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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24. 12:09 삶을 생각하며

신앙

신앙입니까 미신입니까?

신앙과 미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미신을 믿고 있으면서도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미신은 옛날부터 민간 신앙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사회적 현상이나 자연 현상, 또는 신체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과학적인 근거나 교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이해하고 관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주술 의식을 행하고, 길흉화복을 신비성에 의하여 해석합니다.

미신은 성경 안에서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인들이 섬기던 태양신과 수많은 잡신들은 전부 미신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그 미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했으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신 레판의 별을 만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7:42,43)하고 탄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라헬로 말미암아 드라빔이 몰래 들어온 적이 있었으며, 솔로몬조차도 말년에는 이방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인 미신을 섬겼습니다. 마침내 그 미신을 섬기는 죄악으로 이스라엘은 분열되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 인하여 완전히 미신을 믿는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은 미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 9~13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시몬이 마술로 큰 능력을 나타내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미신도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체험하게도 하고 신비스런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양 믿게 합니다. 그들은 이제 그것을 철석같이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의 기초가 되며 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뜨거운 불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은 증거로 붙잡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거나 방언을 하는 것을 구원받은 증거로 붙잡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부터 몸에 무엇이 느껴지거나 눈앞에 무엇이 어른거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일부러 겸손한 체 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환상을 가장하며 헛된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습니다( 2:18,19. 현대인의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주,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 외 그 어떤 것도 붙들거나 붙잡으면 안됩니다. 이전에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붙잡는 것이 신앙입니다.

시몬은 과거의 것을 버리지 않은 채, 미신을 믿던 신앙(?)을 버리지 않은 채 세례를 받았습니다. 실상 그 세례는 그에게 있어서 아무 의미도 없는 세례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은 자였던 것입니다. 결국 얼마 안 가서 그는 돈을 주고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내려졌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8:20).

사이머니(simony)란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은 거룩한 것을 상업화하는 것, 즉 면죄부 판매와 그 외 여러 가지 고안된 영적, 종교적 탈을 쓴 온갖 종류의 상업주의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기독교인들 중에 시몬처럼 본래 습관화되었던 미신적인 의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래 전 어떤 설문 조사에서는 기독교인들 중에 30%가 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을 때 점을 보거나 미신적인 방법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적인 기독교인은 어느 사람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의 살아온 일생이 영화 필름처럼 자기 앞에 펼쳐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내력을 다 알아서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한 처방을 내려준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인은 기도원에 가서 산기도를 하는데 하얀 옷을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서 사업을 이리저리 하면 성공한다고 계시해주어 그대로 했더니 정말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문제만 있으면 산이나 기도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산신령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이상한 종교로 전락하도록 하는데 한 몫 한 것이 기도원이며 신비주의입니다.

아픈 사람 고친다고 안수한다는 것이 지나쳐 병을 고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거나, 심지어 죽게 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병든 것을 무조건 귀신의 장난으로 몰아붙이고, 가난하거나 무슨 일이 안되면 모두 믿음이 없거나 어떤 죄 때문이라고 정죄함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면해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미신적인 방법에까지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부처 앞에 가서 시주하고 백일기도를 하는 것하고, 교회에 헌금하고 등에다 수험생 이름을 써붙이고 백일기도하는 것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결과는 부처 앞에서 기도한 집의 자녀는 일류 대학에 합격했는데 교회당에 나가서 기도한 집의 학생은 떨어진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부처에게 기도한 집 학생의 경우에는 정말 부처가 있어서 합격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집 학생의 경우는 정말 하나님이 안 계셔서 떨어진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모 애타는 마음의 표현이며 자기 자신의 위안일 뿐이지 신앙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그 일생을 합당하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시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류 대학을 나왔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대학교를 안 나왔어도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미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육신의 삶의 모습 자체가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마음의 상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현세적인 축복에만 집착하도록 잘못된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복 신망, 샤머니즘 같은 것들이 신앙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연약해서 살다 보면 병에도 걸리고 다치기도 하고 결국 후패해져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물론 죄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마귀로 인해 병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육신의 연약 때문에 병들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만 약을 쓸 때는 약도 쓰고 병원에도 가야합니다. 무엇보다도 병에 걸렸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이나 어떤 일이 안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내 모든 일의 주재도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잠잠히 받아드리며 억지로 그 형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나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이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사가랴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이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작정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3~7).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의 귀한 동역자였으나 죽을 병에 걸렸었고( 2:25~29), 드로비모도 중한 병에 걸렸었습니다(딤후 4:20). 그것이 귀신 때문이었거나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18:36)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3:20)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문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13:12,13).

기독교인들이 미신적인 신앙을 가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영원한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의 삶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 이사야 65장 11절에서 운수 신()과 운명 신(므니)을 섬기는 자들을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가 인간의 운명과 운수를 주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현실 때문에 일희일비하면서 미신적인 수준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린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처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일 것입니다.

그러면 미신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미신은 현세의 길흉화복에만 집착합니다. 영원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기적입니다. 내가 아프지 않고, 내게 속한 것이 잘 돼야 하고, 무조건 눈앞의 내 모든 일이 형통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미신적인 신앙이 접목되면 기도도 그렇게 하고, 헌금도 그런 목적으로 하고, 교회 생활도 궁극적으로 그런 목적 아래에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자기 소원대로 잘 돼야 정상이고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요해야만 복이고 배가 부르고 항상 즐겁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만 형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의 삶 가운데 가난과 애통함과 고난과 핍박 같은 것이 찾아오게 되면 그들은 즉시 그것을 무슨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이 임한 것처럼 당황해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20~26).

참된 신앙은 미ㅅ션과는 아주 다릅니다. 이 신앙은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별로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이 신앙의 소유자들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며 순례자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은 이타적입니다. 내가 기쁨을 취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구 내가 희생하므로 다른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면 기꺼이 그 희생을 감수합니다. 때로 삶 속에서 심한 고난과 역경을 만날지라도 욥을 생각하며 잠잠히 인내합니다. 병들어 누울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 신앙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4:16)라는 순종함이 있는가 하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3:18) 믿음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은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건강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편견을 갖지 않으며, 모든 일이 잘 되기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오해하지 않습니다.

이 신앙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잘 이해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7:14).

이 신앙은 때로 병듦으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있음을 알며, 때로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아 절망적인 환경이 될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신비를 깨닫습니다.

당신은 이 하나님만을 믿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눈앞의 작은 현실에 콩 튀듯 팥 튀듯 하는 미신적인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당신의 믿음은 신앙입니까? 아니면 미신입니까?

 

-기독교인들은 과연 예수를 믿는가?에서

(전도출판사 출간, 저자:정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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