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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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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6. 21:41 횃불/1978년

하나님의 사람들(4)

죤 리치

(1853~1930)

 

37년간이나 신자(信者)의 잡지(The Believer’s Magazine)의 발행인이었던 죤 리치 형제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샤이어 올드 멜 드럼 마을에서 1853년 9월 10 출생하였다. 그의 고향 애버딘이 화강석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그의 성격도 화강석같은 기질이 많았다.

소년시절에 그는 스콧트랜드 자유교회의 지오 개리오크라는 이름을 갖은 한 좋은 사람의 지도를 받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유리(有利)한 위치에 있었다. 지오씨는 자주 죤 리치 형제의 집을 방문하였고 또한 그와 함께 신생(新生)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죤 리치 형제는 샛별지()의 발행인이었으며 후에 런던에서 유명했던 의사이며 유능한 성경교사인 젊은 로버트 엠 캘리암 형제를 만났다. 로버트 엠 캘리암 형제는 그 마을에서 의료사업을 하면서 환자들의 몸은 물론 뼈에 혼까지 보살펴 주면서 위의 교회의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는데 그의 신실한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은 학자들 중에 죤 리치 형제가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서로 헤어졌다가 이 교사(로버트 엠 캘리암)와 학자(리치) 40년만에 런던의 데본샤이어 하우스의 한 집회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에 그 학자는 연설을 하였고 그 교사는 감사기도로서 그 집회를 마쳤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의 기쁜 재회(再會)이었다.

1859년에는 수천명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힘있는 홍수와도 같은 기념될만한 큰 부흥이 스코틀랜드 전역을 휩쓸었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의 한 결과가 각양의 생()의 길을 걷는 자들로부터 배출된 한 군단의 말씀 증거자들과 전도자들을 일으켰다. 그 중 어떤 분들은 안딜리의 지주인 헤이 맥도왈 그랜트 같은 대지주들도 있었다. 또한 어떤 분들은 던캔 마테슨이나 제임스 터너같은 근로자 출신(動勞者出身)이면서도 다같이 불 같은 복음에의 열심과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전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들의 직계 후계자들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주의의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871년에 도날드 문로와 다른 분들이 애버딘샤이어의 인버루리 읍에서 집회들을 가졌는데 그때 리치 형제는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굉장한 반대에 직면하였고 전도인들에게 대한 개인적인 폭행까지 계획되었으나 하나님의 영은 힘있게 역사하고 있었고 일주일 동안 에 20여명의 젊은 남녀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때 리치 형제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영적 탄생을 체험하였으니 1871년 4월 2이었다.

그 전도인들이 떠난 후에 이 젊은 회심자들은 그들 안에 출생한 새 생명을 위한 양식을 찾는데 실패하였고 강단으로부터의 설교에 만족할 수 없어서 저희끼리 함께 모여서 기도하곤 하였고 또한 성경을 연구하였고 점차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 성도 들의 가르침과 순행을 보게 되었고 그들도 그러한 길을 따라가야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때 이웃 마을 올드레인에서 도날드 로쓰와 다른 형제들이 인도하는 특별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신자들이 성경에 나타나 방식대로 주님을 기억하려 모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수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아침에 걸어서 그 동네로 넘어 왔고 처음으로 초대(初代)의 단순성을 고수하는 주의 만찬의 엄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모든 것을 납득하였고”(고전 14:24) 오래지 않아 그들도 침례를 받아 공공연히 주를 순종하고 그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모임을 시작하였다. 젊은 잡화상의 점원인 죤 리치가 성령의 부어주심에 의하여 전도자의 은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부엌집회나 창고집회 또는 가구점 집회로 모이는 곳곳에서 자기의 주님을 위한 간증으로 조용히 그의 입을 열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하여 그는 더욱 힘이 있게 흥왕하여 갔고 급기야 그의 은사가 더욱 넓게 자라게끔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열망과 놀랍게 뛰어난 기억력 그의 유창하고 불꽃 튀는 청중의 양심에 대한 호소력 자기의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의 그의 불굴의 열심등은 하나님의 존귀히 쓰여지는 그릇으로 나타나도록 결합되었다. 곧 영적 사업에의 요구로 말미암아 그의 직업을 포기하게 되었고 형제들의 축복과 함께 전적으로 주의 사업에 자신을 드리기에 이르렀다. 죤 리치 형제는 1877 6월에 리브스톤 양과 결혼하였다. 커리무이어 읍에 있는 공동친구의 집이라는 홀에서 결혼식을 하여 46간의 결혼 생활을 위한 한 진실한 돕는 배필을 만나게 되었다. 1924년의 그의 부인의 본향복귀(죽음)은 그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심한 타격을 주었다. 그 젊은 부부는 에어샤이어의 달멜링톤 마을에 신혼가정을 꾸렸다. 거기서 리치는 은혜로운 하 나님의 일에 몰두했고 60명의 젊은 신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 후 1879년에 컬마노크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라이스 티 홉킨스와 알렉스 마샬의 가르침 아래 큰 모임이 형성되었고 거기서 그의 도움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 는 복음전파 활동을 위한 편리한 센터를 발견하였고 또한 이제 뚜렷하게 된 새로운 은사인 믿는 자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곳 킬마노크에서도 하나의 준비된 작가의 펜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세계의 거의 각 부분에까지 그의 사역을 미칠 수 있게 만들었다. 킬마노크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젊은 파숫군 47년 전에 출간 되었다. 이때만 해도 발행인 자신이 사무직과 짐꾸리는 일까지 해야 할 때였고 그의 방들 중의 하나는 임시 물품 부티는 방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발간 당일에 다른 젊은 파숫꾼”(현저자)이 책꾸리는 과정 주소달기 그리고 각종 문서 소포에 우표 붙이는 일을 감독하였다. 그 후에는 주일학교 일꾼들의 잡지” “어린이들의 보가” “신자의 잡지. 또한 그 후에 발간된 다른 것들 영국 스콧트랜드에서 발간된 것들 애란 및 웨일즈에서 발간된 것들이 있다. 또한 수많은 영혼들에게 큰 축복을 안겨준 살아있는 목소리의 사역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다작(多作)의 그리고 범세계적인 사역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날 만이 알려 줄 것이다.

많은 책을 만드는 데는 끝이 없느니라”( 12:12)지혜자는 말했고 확실히 그 금언은 죤 리치 형제에게 있어서 사실인 것 같이 보인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은 그의 풍성한 마음에서 한권 한권의 책이 속속히 계속 출간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주는 그의 글의 호소력은 힘있고 박력있고 날카로왔다. 간결한 어법과 신령한 어조 성문(聖文)에 대한 확고한 귀착을 특성으로 하여 특별히 젊은 신자들의 욕구에 맞는 초기 출간의 성막”,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진리의 터등은 많은 재판을 거듭했고 어떤 것은 대륙용어로 최근에 번역된 것들도 있다. 2백여 가지의 책과 소책자 그리고 수백 가지의 전도지가 그의 펜에 의해 저작되었다.

젊었을 때에는 복음 전파가 그의 강음부였고 믿음의 기초 진리에 대한 예리한 제시로 청중의 주의를 훌륭히 끌던 사람은 그 당시 그 밖에 없었고 그의 연설은 박력있는 절구 와 적절한 예화, 자주 터트리는 구수한 유머로 섞인 그의 설교는 항상 청중의 양심을 움직여 놓곤 하였다. 죤 리치 형제는 천생의 조직가였고 젊은이들 내에서 확신과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기쁜 재주가 있었다. 마을에서의 여름수양회를 여러 번 개최하였는데 그런 때에 젊은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기회로 삼았고 조직적인 축호 방문전도를 하게 되고 에어 스터링, 덤프리, 위그타운, 컴버랜드 및 기타지역에서 노천 전도대회를 열기도 했다.

중년기에는 출판 및 저작의 일에 급속히 몰두해 갔고 그러면서 자유로 그의 시간을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일에 바쳤다. 킬마노크 모임에서 수년간 신임 받는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젊은이들을 위한 주일 오후 설교와 성경일기 등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스릴있고 감사한 기쁨으로 기억될 일들이었다. 각국으로 초청 강연도 다녔고 연속집회 수양회에서 설교해야 하는 바쁜 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저작에 더욱 힘썼고 진리 등에 한밤의 기름을 태우는 일을 해야 했다. 1930년 3월 19 갑자기 타계(他界)하셔서 주와 함께 본향에 계시고 있다. 트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가 좋아하던 찬송 주와 함께 영원히 아멘을 불러 장례를 치렀다.

 

(1978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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