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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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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8. 15:09 말씀 안으로

사사기 1

원태수

사사기 1 1~4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2 6~10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신약성경 로마서 15 4절이나 고린도전서 10 11절을 보면 구약성경과 관련해서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5 4절에 의하면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기록된 말씀들이나 사건들이 하나님의 교회시대에 사는 성도들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 11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 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은 구약시대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시대와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시대를 사는 모든 성도들의 교훈과 거울과 경계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는 하나님의 교회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교훈과 거울과 경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 하나님의 교회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하셨지만 저는 그 중에 하나 사사기를 읽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사기를 읽었을 때 저의 느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을 시키셨는데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이러한 왕들을 일으켜서 왕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게 하려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중간에 어떤 과도기적인 상황으로 사사기가 있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읽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 어떤 사건들이 왕이 다스리는 그 상황에 가기 전에 약간 과도기적인 그래서 없었으면 더 좋았을 법한 역사, 그래서 읽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특히 뒷부분을 읽어보면 제사장을 삼는 방식이라던가. 레위인이 첩을 토막 내어서 전 지파에게 보낸다던가 이런 사건들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것이 대체 지금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와 어떤 교훈을 주는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혼란스러울 정도로 말이 안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시던 목적이 아닌 과도기다. 왕이 다스리는 체계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잠시 시간을 주셨는데 그 시간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돈된 어떤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저지른 어떤 행동인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은 사사기에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은 사사기적인 것이지 왕을 세워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사기처럼 각 사람을 개인적으로 직접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중간에 어떤 왕이던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원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직접적인 통치입니다. 각 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직접 통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도 마찬가지로 복음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말씀을 허락하시는 그 말씀이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새 생명을 얻는 즉 구원받는 그 하나님의 목적의 출발입니다.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목적은 중간에 어떤 사람을 두기 보다는 직접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사기를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교회 특히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면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과도기적인 한 역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사사기는 먼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하는 행동의 교훈의 말씀이며 경계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라는 시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원리가 수반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지금시대의 우리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신 이후에 주님께서 공중에 오셔서 교회가 휴거 될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 시대가 진행이 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구약의 그림자로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적합한 말씀이 사사기 말씀입니다. 특히 모든 성경도 하나님의 교회의 교훈과 경계와 거울이 되기 위해서 기록이 되어 있지만 특히 사사기가 지금 하나님의 교회시대에 맞는지를 전체적으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쓰실 때에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이 말씀을 기록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받아 기록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순서의 배열도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관여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사기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들의 근원, 시작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핵심 단어를 보통 형제님들은 내려간다, 떨어져 나간다의 의미로 영어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하며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등 우리가 보는 모든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창세기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과 계시도 그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든지 아브라함, 이삭, 요셉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많은 모습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창세기는 이러한 많은 내용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는 창세기에 죄가 들어온 이후에 애굽에서 즉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구원하시는가 그 역사를 그림자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애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셨습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을 나간다는 책이지만 만약에 그 제목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구원은 아마 유월절 양이 잡히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오면서 끝났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데서 끝이 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줍니다. 구원은 절대로 죄로부터의 구원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도 물론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거주하시는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명한 목적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살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애굽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그 다음에 성막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는 이러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말합니다.

그 다음에 레위기, 민수기가 있는데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어떻게 해야 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민수기는 세상과 관련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들어가는 기록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그것이 예배(제사)를 통해서 관계를 맺는 레위기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거하심으로 백성가운데 거하시기에 적당한 어떤 상태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행동하고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대하여 어떤 활동들을 해야 하는가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는 세상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떤 목적지가 있으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 과정에서 어떤 만족을 가지려고 하거나 정착을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도들은 행인과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지나가며 우리들은 목적지가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이지만 그냥 방황하는 나그네나 행인이 아니라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적지가 분명히 있는데 통과하는 이 세상에서 정착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 마음 속에 어떤 광야에서 만족하려 하는 시도는 하나님의 생각과 떨어져(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교훈들을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다시 총 정리를 하면서 가나안 땅에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단순히 그것만의 목적이 아닙니다. 신명기는 앞서 선포한 율법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신명기에 유독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단어가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는 18, 출애굽기는 42, 레위기는 6, 민수기는 18번 정도가 나오며, 신명기에서는 57번이 나옵니다(한글성경 기준).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반복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원하는 목적이 신명기에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전달이 되어서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을 원하는 것이 신명기의 큰 목적입니다. 단순히 앞에서 말한 율법을 재생해서 의미없이 되새겼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무적으로, 율법적으로,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생성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자답게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 되어서 마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이 목적으로 신명기가 쓰여졌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모세는 신명기를 말하고 난 뒤에 곧 사라집니다. 신약에서 주님께서 요한복음 13~16장까지의 말씀, 곧 죽음을 맛보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증거하며 전달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으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영역을 정복하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도 분명한 교훈이 있는데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맡기셨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누리려면 반드시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은혜로 하늘의 영적인 축복이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축복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는 싸우고 점령을 해야만 합니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고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약속의 땅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들은 결코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들을 성도들이 정상적으로 누리려면 싸우셔야 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빼앗고자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되며 싸우고 노력해야 됩니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지역교회에 어떤 방해가 있던지 간에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모이기를 힘쓰셔야 합니다. 몸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을 알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누리려면 싸우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점령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여리고를 점령하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만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은혜를 취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실행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의 연속입니다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때에 섬기던 장로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를 생각한다면 신약의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명기가 만약에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역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라면 모세가 아닌 어떤 새로운 힘(존재)이 필요했는데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약에 적용시켰을 때 주님은 분명히 그러한 능력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영적인 축복을 누리는데 있어서는 새로운 어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을 보혜사(성령)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이름 자체는 주님 자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실 당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대단한 은사를 가진 기적적인 능력을 가진 사도들이 살아있던 그 시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와 여호수아는 아마 사도행전의 시대를 생각할 수 있으며 대단한 하나님의 축복들을 점령하는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생각할 때 사사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그러한 존재들(예수님, 사도)이 눈(육의)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부어지는, 병고침이나 방언이나 가시적인 이러한 역사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시대입니다. 지금 많은 형제들이 라오디게아 시대라고 말들을 합니다. 에베소 교회로부터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까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호수아서가 사도행전의 어떤 특징과 일치가 된다면 틀림없이 사사기는 계시록의 일곱교회와 일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내용도 일치가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교훈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사기를 내용상으로 보면 물론 1장부터 3 6절까지는 사사기의 전체적인 내용들이 정리되어 총괄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7절부터 16장의 삼손까지 사사들 중 내용이 많이 기록된 사사들, 이름만 간단히 언급된 사사들, 여섯명씩 총 12명이 나옵니다 사사들 기간 중 계속 반복이 되는데 반격을 했다가 징계가 있고, 회개하고 회복되는 이와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17장부터 21장까지는 먼저 말씀을 드렸듯이 아주 이상한 이러한 일들이 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지 어떤 면에서 전혀 이해가 안되는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내용상으로는 분명히 나눠지지만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의 교회시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 시대를 적용시킨다면 물론 나누는데 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많이 기록이 된 6명의 사사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하는 말이 앞 뒤로 해서 일곱 번 정도 나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누다 보면 거칠지만 사사기 1장 초반에 문제는 에베소 교회와 연관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 전체적으로 룻기는 이러한 사사기적인 가운데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 관해서 기록이 되어있고, 그 다음에 여러가지를 볼 수 있겠지만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가 있기를 원하는 영역에서 벗어났을 때, 아마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서 번성하고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신 위치에 있지 않고 벗어났습니다. 엘리멜렉은 이스라엘 땅은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모암 땅에 가면 번성할 것이라 믿고 갔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반면에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보아스는 풍성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벗어났을 때에 그 사람이 뒤에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볼 수 있고, 그 다음에 이런 사사기적인 암울한 시대에 믿음을 지킨 보아스 같은 신실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보아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무엘 상하로 가면 다윗이라고 하는 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땅은 왕이 다스림을 받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을 신약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실제로 다윗처럼 다스리는 시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사기는 분명히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고 사사기의 교훈은 우리의 교훈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사사기와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시대와 유사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사사기나 계시록 2,3장에서 보는 것은 시작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음으로 해서 여호수아의 신실함과 능력의 열매들을 누리면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효과가 지속되는 연장선에서 사사기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유대교와의 완전한 단절, 잘못된 교인들과 분리되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사사기가 출발한 것처럼 잘 출발했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에서도 출발이 아주 좋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가 아닌 자들을 드러낸 것과 니골라당을 미워한 것을 안다고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열심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분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도가 아닌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좋은 출발이 있었던 것이 사사기와 비슷합니다.

두번째는 사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좀 더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 즉 진보와 진행을 위해서 열정과 소망을 가지고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겨주신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열정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전쟁을 싫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대적과 싸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유다가 먼저 올라갈찌니라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형제들과의 교제를 소중히 했습니다. 그리하여 시므온과 같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만족적이고 주변에 있는 형제들의 의견에 관해서 무시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절대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중심으로 한 교제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유다는 이것을 잘 행하고 따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세번째의 접점은 처음부터 실패의 어떤 요소가 나타났습니다. 그 실패는 사사기의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와 확신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어떤 일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을 유다가 데리고 간 것은 아마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 19 1절에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시므온의 기업과 유다의 기업은 관련이 있는데 시므온은 유다의 부름을 받았고 유다의 부름에 응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을 데리고 갔습니다. 형제자매들과의 교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형제들과의 교제는 절대적이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와 형제자매들과의 교제 사이에는 매우 예리한 선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이 조금만 잘못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를 상실하고 형제를 의지하게 되므로 이러한 경우에 실패의 싹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진행 할수록 그 땅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실패하게 됩니다. 19절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유다는 하나님께 주님 저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자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7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보다 거기의 가나안 사람들이 힘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먼저 아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령하고자 하는 땅에 사는 민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약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아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점령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같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영적인 전쟁은 대적이 얼마나 힘이 세든지 약하든 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싸움을 하려는 성도가 주님과 얼마나 접착 되어 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 영적인 전쟁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쟁을 함에 있어서 대적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위에 대적들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대적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강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것을 알고 계셨고 이 대적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적인 축복을 이루는 것을 막고자 하는 뜻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대적들의 활동의 목표입니다. 성도들은 대적이 주위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이나 어떤 것들을 내가 실제로 누리고자 할 때 실제로 방해하는 것이 대적입니다. 그 대적과 싸워서 지게 되면 사사기처럼 대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쟁은 우리 주위에 많이 있으며 대적들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고자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자 하는 위치, 지키고자 하는 그 상태 이와 같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영적인 상태를 방해하고자 하는 대적들이 우리 주변에 무수히 있는 것입니다. 이 대적들은 사사기의 가르치고 있는바 우리에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경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사기는 먼 얘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은 이 대적들을 점령하기를 원하십니다.

네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실패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실패는 점점 커지며 발전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보면 대적들이 압제한 년 수가 있는데 그 년 수가 8, 18, 20, 7, 18, 40년으로 되어 있는데 늘어났다가 잠시 줄어들었다가 나중에 삼손 때에 40년이 되는데 이러한 압제 연수들이 늘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의 소망과 바램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어떤 압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는데 이 상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나는 이 상태가 괴롭습니다. 나를 건져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을 때 삼손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손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형제는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전혀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모습이 하나님의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어떤 대적의 지배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평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상태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합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정상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원하지 않는 상태인 대적들의 지배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함조차도 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사사들조차도 영적인 감각이 감소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옷니엘이 나오고 에훗이 나옵니다. 또 바락이 나오는데 바락은 드보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기를 드보라가 같이 가지 않으면 나는 대적과 싸우러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기드온은 그 어려운 때에 음식을 얻기 위해서 밀 타작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걸 때 진정시켰습니다. 그 다음의 입다는 형제들에게 쫓겨나서 잡류로 생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부름에 계약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비를 거는 형제들을 죽이고 최고의 자리를 원했습니다(12:1~6). 마지막으로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능력과 힘과 은사를 받았으며 동시에 가장 육신적이고 가장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영적인 실행에 완전한 결핍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자기를 위한 기도를 했으며, 힘을 사용하되 자기를 위한 힘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능력과 은사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나온 삼손이라는 사사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보통 주제가 무엇이라고 교제할 때에 왕이 없음으로를 핵심으로 잡습니다. 이 말은 사사기에서 4번 나오는데 18장 이후에 나오는데 그렇다면 사사기의 처음 부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에베소 문제와 같습니다. 마지막의 문제는 라오디게아의 문제와 같습니다. 에베소의 문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일어나는 문제의 근본입니다. 에베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며 처음 사랑에 대해서 형제들이 설명한 것은 많이 있습니다. 사사기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데 사사기의 주제는 왕이 없음으로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있으므로는 어떻게 표현하며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사기 1 1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왕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묻는데 무언가 행동을 할 때, 일을 진행할 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 각각 개인이 하나님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셔야 합니다. 회복이라는 것도 대적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기드온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기드온은 백성들을 향해 나도 왕이 되지 않고 내 아들도 왕이 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기드온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어떤 사람이 서면 안됩니다. 만약 있다면 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이 교제를 통해 인도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뒷부분에 베냐민과의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하는 그 사이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주제는 왕이 없는 상태이지만 긍적적으로 말하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입니다. 여호와께 물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삼손과 아울러서 또 하나 교훈을 받을 것이 있는데, 17,18장에 의하면 제사장과 관련해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을 세우는데 있어서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출애굽기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를 정도로 제사장을 삼고 하는 말과 행동들이 전혀 비정상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비정상적인 이런 상태는 19장 이후에 나오는 도덕적인 이상한 것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도덕적인 회복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도덕적인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제사장적인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뒤에 이상한 도덕적인 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왕이 없음으로즉 주님이 문 밖에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님의 깊은 마음 속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159()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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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