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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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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0. 15:29 말씀 안으로

사사기 2

원 태 수

사사기 2 1~5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어제 사사기를 처음 열면서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 경험하지 못한 환경에 처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력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지도자들이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어떤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기다리는 것보다 영적인 사람에게 가서 질문을 하고 해답을 아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으며, 물론 그러한 유익이 있으며 그러한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생각해야 될 것은 주님께 직접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직접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과거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다스리셨던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러한 경험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며 손가락으로 헤아려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출발은 분명합니다. 앞에서 복음전도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해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잘 설명되고 논리적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듣는 개인이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합니다. 더불어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 어떤 성도도 성장할 수 없고, 진보할 수 없고,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 성도가 성장하지 못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 성도 책임이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얼굴을 각자가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이러한 경험을 했고 그 다음에 출발한 이후에 모든 삶의 경험들도 성도들이 조금씩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아무리 훌륭한 말씀 증거자가 말씀을 잘 전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과 삶을 변화시키려면 성도들은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태에서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말씀이 우리들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2 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내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이 땅으로 인도하신 분도 주님 자신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주님의 이러한 역사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구원 받았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역사이었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성도들은 다 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 성도들은 구원받을 때의 그 하나님의 역사를 가지고 일평생 단 한번의 하나님의 역사를 만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출발해서 계속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고, 어디로 인도하고 싶으신지, 무슨 뜻이 있으신지 그 말씀에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구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는 분들은 주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에 이끌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이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거기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의 분위기에 마음이 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마음에 끌려야 할 매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고, 세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모이는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네 바퀴의 큰 수레바퀴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 주님의 징계, 회개, 회복이라는 네가지의 바퀴가 있다는 것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에는 원 거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이 거주민은 신약시대의 많은 어떤 것들을 상징합니다. 크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열매 맺는 것들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라고 총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교제와 교통을 막는 하나님을 향한 열매 맺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백성들이 누리는 것을 막는 많은 것들을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육신도 있고, 죄도 있고, 세상과 사단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사기에는 다방면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교제의 기쁨을 막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과 싸우고 진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육신이 얼마나 강한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도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으며, 마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대적을 향해 맞섰을 때에 내가 가진 힘이 정말로 이길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가, 내가 주님의 뜻에 얼마나 착념되어 있는가 하는 것들이 영적인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반역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관련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은혜로우시게도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말씀을 주셨습니다. 길갈은 육적 몸이 벗어지는 할례의 장소이며 육신적인 것이 그리스도인에게서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보김은 5절에 우는 자, 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길갈에 위치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육이 제거된 자답게 항상 길갈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 위치해 있지 않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위치에 가게 되느냐 하면 우는 자의 위치에 가게 됩니다. 물론 6절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로 반응을 했습니다. 첫째는 울었으며, 둘째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가 어떤 제사인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예배와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반응은 좋게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무감각한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물을 흘리고 제사를 드리는 상태는 그나마 좋은 상태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슬프게도 이러한 백성의 반응은 뒤에 계속되지 않고 일시적이며, 임시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많은 경험 속에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게도 길갈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우리의 마음을 찔러서 예배에 대한 소중함과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아주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라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러한 마음들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것들이 2 1절의 뒷부분에서 보여지면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기억하시면 은혜가 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했습니다. 반역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죄를 짓는다는 뜻일까요?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잘못된 것을 행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것으로 가는 첫 출발은 무엇이겠습니까? 반역의 첫 출발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처음 사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주님을 향한 따뜻한 마음, 주님께 묻고자 하는 마음, 주님의 말씀에 가감없이 나의 상태를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정말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알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이 상실되었을 때 주님은 우리 눈 앞에서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갑니다. 그것이 타락의 시작입니다. 타락은 죄를 향한 일보가 아닙니다. 타락은 하나님께로부터 일보 떨어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식어진 그 결과는 그 성도가 죄를 향하여 어떻게 나아가지 않아도 그 결과를 짐작하고 성경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묻는 것으로부터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힘이 점점 줄어들고 오히려 대적들의 힘은 점점 증가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적들이 행하고 있는 어떤 행위가 매력적으로 보였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이 들었으며 그리하여 바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하나님과 같거나 비슷합니다. 바알들이라고 복수로 나오는 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가지고 있는 온갖 종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 중 하나님의 성도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주로 시인한 분들입니다. 이 분이 우리의 마음 속의 최고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이 분은 그 자리를 억지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으로 계시다가 성도들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지면 성도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통해서 살아가는데 무엇을 통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최고의 자리에 계시면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반드시 그것을 대체하는 무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무엇이든지, 주님이 아닌 어떤 것으로 마음에 중심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바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참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해지고 이것을 등 뒤로 던지게 되면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스럽게 우상이 스며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서신서 마지막에 우상을 멀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처음 사랑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시작됩니다. 즉 주님을 최고의 자리를 주지 않았을 때 그 사람들의 반역은 시작됩니다. 신명기 5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기를 모세여 당신이 말해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두렵습니다. 모세 당신이 대신 말씀을 해도 우리가 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 다만 그 마음을 항상 품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마음을 계속적으로 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마음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잠언 4 23절에 보면 우리의 마음을 지킬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제 신명기에서도 마음을 강조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위가 반영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은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이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한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아들을 징계하며 참 아들이 아닌 자를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참 아들에게 매를 드시며, 또한 고난 가운데 밀어 넣으십니다.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자유의 귀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일에 전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의 손에 파셨다, 붙이셨다라는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의미는 이러한 것입니다. 대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대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셨다, 붙이셨다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징계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의 백성이 단순히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의 손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통치와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이 개인적인 연관을 맺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원리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집단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옆에서 말씀을 전해서 돕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 구원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반드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확장으로서 그 이후에도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교회를 형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거기에 주님에 계시다면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 모인다는 이 이름은 성령만이 개인을 이끌 수 있으며 그 이름의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근본, 근간이 되는 주님의 이름을 늘 마음 속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회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성경은 회개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합니다. 회개만 가지고도 여러가지 말씀을 드릴 수 있으며 회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벗어나고 해결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큼 나는 악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회개의 자리에 섰을 때 그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일곱교회 가운데 두 교회만 빼고 책망이 다 주어졌습니다. 그 책망을 하면서 그 교회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요구하신 것이 하나 있는데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믿지 않는 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 좀더 말씀드리면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기의 주제에 대해서 많은 말씀들을 합니다만 어떤 분은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가?”라고 하며 이것이 주제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의인이 왜 고난을 받을까?’ 그 질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속에 계속 이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에 무언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의인인데, 순전한데 왜 고난을 받게 하실까?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시는 분인가?...’ 등등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좋게도, 또는 나쁘게도 생각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욥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마지막에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마음 속에 강력하게 남습니다. ‘욥기의 주제는 회개다.’ 주님은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 다윗을 예로 들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했는데 그 후에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그 과정을 욥기처럼 길게 상술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 옛적에 죄를 범한 다윗을 예로 들지 않으셨으며 또 시간적으로 뒤의 일이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습니다. 이 사울이 회개하면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예로 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정말로 회개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도 성도들을 죽였으니 당연히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을 절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순전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이 순전함에 마귀도 굴복했습니다. 그 사람의 깊은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드러내실 수 있었습니다. 욥은 그 회개의 자리에 가기를 거절함으로 말이 많아졌고 변명을 많이 했습니다. 욥은 정말로 순전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한 면으로 보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말한 이후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욥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회개의 자리에 가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무슨 말을 하리요 내가 내 입을 가리우겠습니다.” 주님은 그 말을 듣고 욥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고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중에 욥은 내가 재 위에 앉아 회개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 때에야 욥에게 축복을 하실 수가 있었고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회개의 자리는 후회의 자리와 다릅니다. 가룟유다는 후회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로 그 죄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탕자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회개해야 되겠다고, 이렇게 말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에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서 그 말을 하기 전에 아버지가 달려와서 아들을 안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그 아들이 돼지 우리에 있을 때는 아버지는 절대로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영혼이 회개해야겠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마음 속에 생각을 했지만 그 몸 자체가 돼지 우리에 있을 때 아버지는 절대로 달려가서 입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는 자리에 왔을 때는 아무리 상거가 멀어도 아버지께서 직접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기 전일지라도 안고 입을 맞추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사람은 일을 할 수 없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만 하나님은 일하실 수 있는 자리가 회개의 자리입니다.

이 회개의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 회복을 시키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앞에 모세나 여호수아, 또 뒤에 나오는 왕들, 이러한 사람들과 대비해서 사사라고 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사들의 어떤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사사를 기억할 때에 계시록 2,3장의 하나님의 교회의 사자를 생각합니다. 사자와 사자의 특징이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구약과 신약의 이들의 역할이 틀리겠지만 구약은 그림자로서 그 특징이 아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약의 사사 또는 교회의 사자들이 많이 일어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사사들의 특징을 보면 모든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이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사라고 하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첫째 사사는 내가 적을 대면해야겠다는 용기와 기꺼움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적이 있는데 그 대적을 대면하기를 싫어하고 귀찮아하고 무서워하고 등 이러한 것들은 사사의 특징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예를 들면 바락의 경우 드보라가 같이 가야만 내가 대적과 대면하겠다는 것이 있었지만 적어도 사사라면 대적들을 향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대면을 해서 싸우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이 사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에 아주 관심이 많고 그 상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의 상태는 다른 무엇이 아닌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하나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사사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를 지지해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민족들의 지지가 없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심지어 삼손에게 가면 지지는커녕 오히려 붙잡아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줄 정도로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번째는 이 백성들과 연관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상태는 백성들의 그 죄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지만 주님의 이름이 그 백성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대적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압제를 받을 때 대적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것을 사사들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의 경우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을 당했겠는가?”라고 그 하나님의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왼손잡이 사사 에훗은 모압 왕에게 가서 내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할 것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 모압 왕 에글론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사사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연관된 주님의 이름과 연관해서 움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네번째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떤 가망없는 전쟁에 이끌어 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사들은 자기 마음 속에 이 일을 위하여 이 목적으로 하나님이 그 일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능적으로 어떠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위해서 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일으키셨는지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생명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사들은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독려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사사의 설득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싸움을 위해서 일어난 것은 사사 마음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동일하게 그 백성들 마음에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의 어떤 설득력 또는 영향력보다 자기가 아무런 백성의 지지가 없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위해서 싸우려고 일어난 것처럼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영적인 싸움을 위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며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일이 구원받고 난 후에 우리들에게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아주 빈곤한 상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감지하고 그 백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어나야 할 형제 자매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인 것입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이것과 아울러서 처음 나오는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살펴보겠습니다.

3 7~12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주님께서 첫번째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로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습니다. 메소보다미아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 72,3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떤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그 영역에서 나오기를, 즉 분리되기를 원하는 어떤 장소였는데 그것이 바로 메소보다미아였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분리 되어 나오기를 원하는 어떤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들에게 적용시킨다면 죄나 세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리되기를 원하시는 어떤 영역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소보다미아로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과 죄에서 건져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주님의 완전한 분리에 의해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고서 애굽으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광야에서 애굽의 많은 것들을 생각했고 애굽의 많은 영향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또는 나타내고자 원하는 그것에게 종을 삼도록 허락하시고 파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세상과 분리되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과 분리되었고 죄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막기 위해서 그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9절에 보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그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에 젖어서 실행되어지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8년 만에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 우리의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내가 있는 이 상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인지를 했고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속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우셨는데 살펴보겠습니다.

옷니엘은 이미 1장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8절부터 유다 족속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옷니엘입니다. 8절에서 유다족속은 헤브론을 취했습니다. 헤브론은 교제를 말합니다. 옷니엘이 사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번째 사사가 될 수 있었던 어떤 이유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로 헤브론과 연관되어서 특징지어졌는데 헤브론은 교제를 말합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힘의 공급이 필요한데 그 힘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서 연합된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 몇가지 예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을 보면 자기의 육신의 조카 롯이 소돔왕과 더불어서 붙잡혀 갔을 때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거했습니다. 창세기 14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전에 어디에 거했느냐 하면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습니다. 이것에 장소에 대해 13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이 장소가 헤브론을 말하며 헤브론은 교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백성을 구출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옷니엘은 첫번째 사사의 특징으로서 헤브론을 확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확보한 사람입니다. 사사기로 돌아와서 1 11절을 보면 기럇 세벨을 취한 사람입니다. 기럇 세벨의 의미는 책들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기럇 세벨은 책들의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놀라운 지혜들이 집약된 책들이 엄청 많이 있습니다. 이 책들과 관련해서 그러한 책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더불어서 드빌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습니다. 드빌은 신탁, 또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5:39) 주님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인데 참으로 목적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상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올바른 목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지성소와 연결시키지 못하면 어떤 말씀도 그 사람에게 연결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의 이 원리를 생각하면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수히 많이 들었는데 그 말씀이 역사하던가요? 그리고 그 말씀의 역사가 없을 때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가요? 성도들은 그것에 대해 분명히 없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날 그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맏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2장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역사하신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역사는 계속적으로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옷니엘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악사라고 하는 여인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 형제자매들은 영적인 남편(아내)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기럇 세벨을 정복하고 드빌을 확보하십시오. 이 세상에 온갖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지성소를 확보하게 되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결혼으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악사에 관해서 많은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악사의 외모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4절에 갈렙에게 구하고 남편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 악사는 내면적으로 아름답고 영적인 사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옷니엘은 이미 3장에 하나님께 사사기에 나오는 첫번째 사사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 이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사용해서 이 일을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옷니엘은 이 일을 할 때에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드빌과 연관된 것으로 확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옷니엘처럼 어떤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은 옷니엘은 좀 더 넓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지금 작게 보이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십시오. 그리고 드빌과 관련시키며 하나님의 교회를 절대로 자신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확보되었다면 그 주님의 이름이 나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끌림을 받았다면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키기를 바랍니다. 룻기처럼 하나님의 땅에 문제가 생기고 기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정말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옷니엘은 이러한 사사로서 활동하기 전에 이러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11절에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 전쟁은 완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태평이 찾아왔습니다. 뒤에 나오는 입다, 삼손 때에는 태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그 전쟁이 불완전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옷니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했고 완전한 대적에게의 승리로 말미암아서 태평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40년의 태평으로 진실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옷니엘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악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시험의 기간을 통과했습니다. 옷니엘이 죽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본색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매우 주의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주제와 맞물립니다. 이 세상에 우리 주변의 영적인 형제 자매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눈 앞에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정말로 각 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성도들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영적이고 신령한 형제가 말하는 말은 주님의 말씀이고 그 주님은 형제 자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성도가 눈 앞에 사라졌을 때에 주님은 늘 우리 성도들 개인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험을 받는데 그 영적인 형제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정말로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주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사사기의 주제와 분명히 통합니다. 하나님은 그 성도를 개인적으로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영적인 형제가 눈 앞에 사라지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모세 때에도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훌륭하고 기적을 행하던, 그 강력한 하나님의 종이 40일 동안 보이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행동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그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이 중에서 참으로 부족한 자입니다. 신령한 형제들이 말씀을 증거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의 지역교회로 돌아갔을 때 말씀을 증거하신 이 분들은 눈 앞에 보이지 않을 것인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사사기의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와 제어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자리를 이 분께 내어드리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을 더욱 깊은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1 5 10()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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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