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1. 10. 11. 11:40 말씀 안으로

기이한 가지

스테펀 휘트모어

잠언(30:18,19)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의 것들을 봅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에 대한 모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1.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

2. 반석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

3.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4.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

1.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

우리는 여기서 땅에 있는 것들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땅 위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하늘의 반점처럼 공중으로 높이 치솟는 독수리의 기이함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먹이가 되는 가장 작은 동물이라도 발견하면 와락 달려들어 가로챕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미한 것들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의 마음까지 완전한 지식으로 헤아리고 계십니다. 바로 독수리처럼 주님은 육안으로 뵐 수 없지만 모든 것들을 인지하시며 창조의 가장 하찮은 측면까지 살피십니다. 생명의 모든 부분들이 그분의 섭리 아래 있음에 대해 감사할 뿐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공의롭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완전한 대가를 지불 받을 것입니다.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찾고 있는 동안 주님은 그분이 하감하시는 이 모든 일에 관심을두고 계십니다. 그분에 대한 이런 온전한 지식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그분은 우리가 실로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심지어 무엇 때문에 지음을 받았는지 알고 계시며 또한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심판의 두려움으로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최악의 형편에 처해있는 우리를 체휼하시는 분으로서 그분께로 경건히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히 찬양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그분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고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기록하셨듯이( 8:28)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그분의 지식을 사용하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큰 감사가 되는지요. 하지만 때로 그분의 사랑은 아들을 책망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12:57). 이는 형벌이 아니며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키시기 위한 교정 행위입니다.

2.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두 문형을 보게 됩니다. 뱀은 위장과 속임을 베푸는 사단의 모형이고 바위는 우리 주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기어 들어갈 만한 틈새를찾으며 바위 위를 지나가는 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주님을 만나매 그분을 탐색하고 시험했던 사단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유년기 때 헤롯왕은 주님을 멸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광야에 계실 때 사단은 그분의 인격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가셔야만 할 그 길을 벗어나게 하려고 묘한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이샤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16:23).

우리는 어떠한 형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초월하실 수 있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령 원수들이 그분을 멸하려고 시도하면 적절한 기회를 타서 그들의 질문에 응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자신들의 권세 아래 굴복시키려 했을 때에도 역시 그분은 처지에 능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대한 영광스러운 보장입니까! 만일 주님이어떠한 악조건도 극복하시는 주인이시라면 자녀 된 우리도 그분의 능력을 확신하는 가운데 즐거이 안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광야에서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봅니다. 이는 대단한 육체적 연약의 시점이며 상황적 여건이나 특성은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사단의 완전한 무장을 보여 줍니다. 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사단은 항시 삼중적 공격을 즐겨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및 이생의 자랑이 그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하와)를 공격하는 모습과 누가복음 4장에서 남자(주님)를 공격하는 모습은 서로 흡사합니다. 하지만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범죄하실 수도 없는 우리 주님은 단 하나의 흠집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베드로나 혹은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을 통한 위선과 사위의 모습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시험의 범위를 초월하십니다. 그분은 두가지이유에서 실족하실 수 없습니다. 첫째, 그분은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둘째, 그분 안에는 하나님이 뜻을 벗어나 어떠한 유혹과도 타협할 만한 요소가 없으십니다. 바위 위의 뱀과 반석(주님) 위의 뱀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위 안에는 뱀이 찾아낼만한 틈새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단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오점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3.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여기에 나타나는 관념은 흉용한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배에 대한 것입니다. ‘가운데’(midst)라는 단어는 중심부(heart)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 전적으로 바다의 자비가운데 맡겨진 한 배가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여기서도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신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시편은 그분의 거룩한 영혼을 짓누르는 물결과 파도의 관념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거스려 거세게 밀려드는 폭풍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분을 증오했던 인생들의 적대감을 나타내 줍니다. 그들이 보좌의 주위를 에워쌈으로 어둠의 권세는 우리 주님이 감당하셨던 고난을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가장 두려웠던 것은 분명코 그분에게 쏟아졌던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우리 주님이 어떤 인생들보다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결정적인 아픔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을 위해 분노를 기꺼이 감당하셨던 그분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형을 반추해 봄으로써 더 한층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는 폭풍의 자비 가운데 맡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14:31)라는말씀과 함께 나아가셨습니다. 동산에서 그분을 체포하러 왔던 자들이 내로라”( 18:16)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엎드러져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어떤 면에 있어서도 자비 가운데 계시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온전한 지식과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심 가운데 나아가셨습니다. 좀더 생각해볼 점은 이렇습니다. 배라는 것은 언제라도 파선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그 안에 타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실종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장되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할수 있습니다. 그분은 고된 분투 끝에 폭풍우에 대항하여 용감히 맞서심으로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은 믿는 자들에게 결코 발하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풍파란 주님이 벌써 겪으셨던 것이요 또한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그분은 우리와 함께 폭풍우를 타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43:2).

4.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

우리는 여기서 성경 전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형 중의 하나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자주 성경에서 신부란 말을 대하며 이런 표현은 우리들이 신랑되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취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분 자신의 것을 취하러 오실 주님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기대와 소망으로 그분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이자 특권입니다. 아마도 여기서의 강조점은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썼던 내용들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갈망하시는 바의 뒤에 숨겨진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이나 라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습 속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그러한 사랑입니다.

에베소서(5:25)에서 주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선물이란 표현보다 더 강력한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분이 지니신 모든 것을 내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습니다( 13:46). 그 비유가 암시해주듯이 말입니다. 신부를 취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간절하신 열망을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남자라는 단어는 강하다라는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압 여인인 룻을 그의 아내로 택하였던 능력있는 부자 보아스를 기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하여 자신의 기업의 손해”(put his inheritance at risk. 4:6역자 삽입)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손해를 감당하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분명코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취하기 위해 지상 생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드님의 위치를 취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을 깊이 묵상하노라면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벅차오르는지요.주님이 모든 면에 있어서 인생들보다 얼마나 뛰어나신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숙고해 볼 수 있지만 이는 그분의 성품의 기타 여러 모습들과 실례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말씀 안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림과 둠밈  (0) 2012.01.22
요한과 바울의 비교(3)  (0) 2012.01.06
요한과 바울의 비교(2)  (0) 2012.01.06
요한과 바울의 비교(1)  (0) 2012.01.06
가정을 세우고 모임을 지키는 것  (1) 2011.06.13
사사기 2장  (0) 2011.06.10
사사기 1장  (0) 2011.06.08
하나님의 구원의 대로(大路)  (0) 2011.03.31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