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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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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9. 15:35 횃불/1979년

성경해석의 원칙(10)

13. 문맥상의 원칙

. 정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실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동일한 내용 또는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그 대목에 기록해 주심으로써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성경의 모든 장, 절은 전후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직 창세기 1 1절만 앞의 연결 장절이 없고 계시록 22 21절만 뒤에 연결되는 장절이 없다.

그러므로 각 절은 문맥을 통하여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어느 한 절만 뽑아서 문맥상 연관 없이 해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 실례

1. 수양과 수염소( 8)에 관하여는 본문을 읽어보면 분명히 의미를 알 수 있지만,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려 한다면 수수께끼에 불과한 것이다.

 

2. 마른 뼈들로 가득차 있는 골짜기( 37)는 교회가 아니다. 문맥으로 보아 이 대목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에는 문맥의 이해 없이는 전혀 깨달을 수 없는 대목이 많이 있다.

 

3. 성경은 스스로 성경을 증거해주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다면 이같은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당신은 어느 한 구절이나 한 절의 한 부분을 뽑아서 어떤 이론을 증명하는데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심정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이같은 태도는 성경을 연구하는 올바른 태도가 못된다.

(1) 빌립보서 2:12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너는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밖으로 드러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아울러 14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에 관해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은 성도의 올바른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2) 로마서 8:28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신 말씀은 아무거나 선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3) 요한복음 6:37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는 전제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다.

(4) 시편 2:8,9의 말씀이 한때 선교를 위한 말씀으로 인용되곤 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라는 말씀을 가리켜 우리가 기도하면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된다고 이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 온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되고 천국이 실현될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교를 위한 교훈이 아니다. 이 말씀은 신실한 일꾼들이 이방인에게 나아가 수고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라는 말씀은 결코 선교활동을 가리키지 않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우시게 되는 천년왕국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절의 말씀은 복음을 통한 세상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킬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러나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해서 세상이 점점 개선되고 마침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화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노아의 날과 같이 계속 타락해가고 있으며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

(5) 사도행전 16:31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특별한 명령이었다. 문맥으로 보아 이 구절은 통회하고 있는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된다. 그 간수는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깨달았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간수는 모든 죄수들이 도망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처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려고 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감방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바울이 소리쳤을 때, 그는 간수가 자살하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꿇어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그가 외친 것은 육신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죄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죄책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죄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이라면 왜 구주가 필요한가를 먼저 가르쳐 주었어야 할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믿어야 하는 것이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어야 한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그에게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 그 결과로 간수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믿고 기뻐했다. 물론 각자가 개인적으로 믿어야 하며 간수의 믿음이 온 가족을 구원한 것은 아니다.

 

4. 성경학자들도 문맥상 해석의 원칙을 강조한다.

(1) 토레이(Torrey)-문맥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다.

(2) 토드(Todd)-어느 구절이나 대목을 상고함에 있어서 문맥적으로 상고하는 것은 가장 으뜸되는 원칙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릇된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

(3) 모이어(Moyer)-전도자 중에는 말씀을 준비하기 위하여 주제를 선택한 다음에 이에 알맞은 성경 구절을 둘러 맞추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설교준비라 할 수 없다. 궤변이라고 하면 지나칠 것인지?

(4) 로크 하트(Lockhart)-문맥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열쇠이다.

 

5. 밀접해 있는 구절의 문맥상 해석

아·주 가까이에 있는 구절에서 비췸을 받고 난해한 대목을 깨닫는데 도움을 얻는 경우가 있다.

: 요한일서 4 17절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었다는 말씀은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6. 성경 전체로서의 문맥상 해석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경의 다른 대목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기도 한다.

(1) 창세기 18:20,21-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하여 가사와 다른 두 도시를 멸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10:19). 그런데 아브라함은 오직 한 도시를 위해서 기도했다. 왜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인정상 그렇게 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멸망 당할 모든 성읍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지 어찌 롯이 머물고 있던 성읍만을 기도했겠느냐는 것이다.

창세기 14:12말씀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 살고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소돔에 대해 관심이 컸다. 어떤 사람은 소돔 사람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있던 아브라함은 롯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 도성을 구원해달라고 하는 심정으로 이처럼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도한대로 행하시지는 않으셨다. 즉 그 조카 롯을 구원해 주셨지만 그 성읍은 끝내 멸하셨다.

(2) 창세기 24:15-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흘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동생의 손녀가 아브라함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창세기 18:11,12을 볼 때 이삭은 틀림없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모세의 부모간도 이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3) 창세기 37:25,28,36 39:1을 대조해 보라. 소위 고등 비평가들은 이 구절의 말씀은 성경의 모순성을 드러내주는 실례라고 비난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이스마엘 사람이 번갈아 기록되어 있는데 사사기 8:24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간 기사도 그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판 것인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판 것인지 완전히 혼란이 되고 말았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문자주의자들은 어떤 교묘한 방법으로 이런 구절들을 해석하려는가?(국내 모 비평가의 글에서 역자삽입)-창세기 15:11,12이나 25:2에서 이에 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이스마엘과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소생으로 이복 형제간이었고 그들은 같은 지방에서 살았으며 생활양식도 같았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미디안은 동일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사사기 8:24부터는 이스마엘 사람은 다 미디안에 동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디안은 이스마엘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남아있게 되었다. 모든 카나다 사람이 영국인이지만 모든 영국사람이 카나다 사람은 아닌 것처럼, 이스마엘 사람은 다 미디안 사람으로 동화되었지만 모든 미디안 사람이 이스마엘 사람은 아니다.

 

(79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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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