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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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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1:54 횃불/1980년

오늘날의 방언(3)


다른 신자들( 19)

사도행전 19장에서 우리는 세번째로 방언에 관한 기록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유대인이나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인 것을 보게됩니다.

이 열두 사람은 구약 신자들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아의 오심과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들은 것을 믿었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또한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믿었을 때 일어났던 표적이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언의 은사는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이 교회에 영접될 때에만 주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가 유대인, 그 다음이 이방인, 그 다음이 구약 신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때 똑같이 모든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즉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방언을 말했던 사람들은 이 은사를 얻기 위하여 요구(기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방언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언을 하면서도 놀랐던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방언의 은사가 주어질 때는 경건하건 안하건 관계없이 또는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방언을 했습니다. 또한 방언의 은사는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이 처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을 때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세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고 난 얼마 후에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때에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어디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곳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신약에서 오직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1 33절에 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고린도전서 12 13절입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모두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모든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기이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13절의 모두라는 말은 사도행전 2장에서 역사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세례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었고 그들 안에 죄가 있었으며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영적인 어린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후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성경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님을 받으며,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성령님으로 인쳐주시는 것입니다.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에 대하여 모두 연구하여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가복음 16장에서 주 예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특별한 표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새 방언입니다. “새로운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 자체가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람에게 새롭다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새로운 것이라면 헬라어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2) 이 약속대로 사도행언 2장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표적으로써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 은사가 주어짐으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들이 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말한 적도 없는 언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언어였습니다.

(3) 이 방언은 사도행전에 단지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첫째가 이방인이 교회에 영접될 때였고 두번째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이 사람들이 방언을 계속했다거나 혹은 정기적으로 일어났다고 우리가 믿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처음에 일어 난 것같이라고 말하여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성령님을 받았을 때 몇몇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5)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이 시작될 때(그들이 주님을 믿었을 때- 10:9), 혹은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이 교회가 시작될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 주님의 일을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였을 때 받지 않았습니다.

(6)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성령의 두번째 세례가 있다고 믿기가 어려우며,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믿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1:13). 그 후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5:18),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8:14),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5:16).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힘썼다는 기록은 읽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단어는 고린도전서 12 13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는 한(동일한) 성령으로 이미 세례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것은 약 60년간 여러 종류의 오순절파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해 왔으며 이것은 지난 15년 여 동안 천주교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많은 교파들의 여러 무리에 의해 채택되어 왔습니다. 방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환상과 육체의 전율감을 종종 수반하는 방언을, 믿는 자의 몸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경험이 구원의 증거라고까지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그리스도인의 효과적인 삶과 증거를 위해 능력을 특별히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반면에 방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순전히 자연적인 근거를 지닌 심리적 현상의 하나로 믿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귀신의 영향에 기인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리스도인적 성품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도 방언 현상이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서 성령님이 활동하시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을 뿐더러 성령님의 활동에 필요한 증거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재잘재잘 지껄임을 체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심각한 죄에 빠졌으며 심지어 지독히 나쁜 불신으로까지 빠졌습니다(따라서 방언 자체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이에 반해 방언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경건한 삶을 살면서 복음 전도의 면에 있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 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2류 그리스도인들로 취급하는 경향과 더불어 일종의 영적 교만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고 그 경험을 열심히 추구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황홀경의 방언을 하는 현상이 꼭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방언 현상은 이교도 부족들과 강신술사들 이슬람교의 어떤 교파들, 기타 다른 여러 무리들 사이에서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람들은 방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 중 하나로 전혀 간주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지 여하에 따라 심리학적인 기교를 사용하여 일정 기간 동안 방언을 말하는 상태로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방언 현상은 때때로 순전히 지연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해답은 항상 성서적인 것이 되어야지 변화무쌍하고 불확실한 개인의 체험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단지 세 책 안에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방언이 교회의 주요 가르침이나 실행 사항 중의 하나가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방언이 처음 언급되는 곳은 마가복음 16:17-20절 인데 여기에서 방언은 주님의 사도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확증하는 표적들 중의 하나로써 귀신을 쫓아내는 것, 뱀과 독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과 더불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표적들은 사도들의 사역 기간 동안 여러 경우에서 실제로 성취되었지만 마가복음 16:17-20 안에는 그와 같은 기적들의 지속 기간이나 그 빈도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방언이란 주제를 잘 설명하는 분명한 단락은 사도행전 2:1-1절 인데 이 때 믿는 자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문맥이 분명히 말하는 바는 이 방언이 실제의 언어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의 여러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달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이 표적의 기적적인 성격은 듣는 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베드로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언어 능력의 동일한 표적은(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혈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을 때( 8:14-17), 그 다음에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10:44-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례 요한을 간접적으로 따라다니던 에베소의 특별한 무리들이 처음으로 진짜 복음을 들었을 때( 19:1-7) 주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것들 외에 방언에 관한 다른 언급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술한 사항에서 중요한 점은 이 은사가 복음을 확증하는 하나의 표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말하는 자에게 그 매까지 알려지지 않은 실제의 인간의 언어로 그 복음을 말하는 기적적인 능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방언이란 단어가 모두 이상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깨닫는 것도 역시 중요한 점입니다. 따라서 방언이 황홀경에서 뜻을 알아들을 수 없이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말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단어는 언제나 언어또는 실제의 신체 발성 기관을 의미합니다.

 방언이 언급된 서신서는 오직 고린도전서 밖에 없으며 이 서신서의 12, 13, 14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다른 교회에서는 방언이 사용되지 않았든지 또는 적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로 나와 있으며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만이 그 특정 은사를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전 12:28-30).

 방언은 어느 정도 구경거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불필요하게 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중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5,9).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자 할 때 그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교회 안에 없으면 그 사람은 방언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고전 14:13, 28). 또 그는 이 방언의 은사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믿는 자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4:22).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관한 바울의 묘사와 가르침은 현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상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적 방언의 은사가 이름은 같으나 실속은 현대의 방언과 전혀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방언도 그치고라는 바울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고전 13:8). 방언은 말씀을 확증할목적으로 주어진 성령님의 은사였기 때문에 그 용도가 다하면 철회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전파되는 사도들의 말을 지지할, 기록된 말씀이 없었던 사도 시대에는 방언의 은사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복음이 새로운 언어 그룹 내지 새로운 지역으로 처음 들어갈 때 특히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일단 완성되자 이 은사와 다른 기적적 은사들이 존재할 필요가 거의 또는 전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의 의미였다고 생각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우리가 현재 소유한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특별한 표적들이 있어야 할 필요 내지 가치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믿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성경은 그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인 서신서에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순절에 참석했던 지도자들 중 4명이 신약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였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주님의 형제로 전해지는 야고보와 유다였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그들이 기록한 서신 가운데 단 한 곳도 방언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서신서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개인과 성령님의 역사에 관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27번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신약의 서신서 중에 (히브리서를 포함한다면) 14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지만 그 중에 방언에 관해 기록한 서신서는 고린도전서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중에서도 오직 12, 13, 14장뿐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또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훌륭하다거나 신령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들이 주님의 일에는 장성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 중의 하나로써 A.D. 5657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3차 전도여행 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표적이 일어났던 사도행전의 변화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도들의 인내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으로 곧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습니다( 28:28).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던 때는 이보다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방언을 말하고 통역하고 혹은 예언을 했습니다(고전 12:810). 모든 사람이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 29,30절은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그의 서신서 중에 고린도전서에서만 유일하게 방언에 관해 기록했으며 방언에 관해 말한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된 사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이 서신서를 통해서 바울은 방언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이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에서는 모든 은사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주님께서 이 은사들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설명해주시며, 또한 은사를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고린도전서에서 다른 여러 은사들을 비교해 주셨으며 방언보다 더 유용한 은사에 대해서도 지적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방언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방언에 관해 수다한 논쟁을 하지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또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진리들

우리는 고린도 성도들이 논쟁한 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고린도 성도들이 하던 방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했던 방언이 달랐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셨을 것이고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말씀하는 대신에 방언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소개하심으로 혼란을 없게 하셨을 것입니다.

몇 가지 다른 번역의 성경은 알지 못하는혹은 알지 못하는 언어 또는 설교라는 단어를 방언에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원어에는 없습니다. 혀나 언어를 의미하는 글로싸”(glossa)는 결코 다른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2)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가 선물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꾸짖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을 더 잘 섬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믿음이 자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고 계발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3)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다른 일들에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은사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아직 어리고 장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14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은 서로 분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간음한 자를 출교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었습니다(5). 그들은 서로 다투었으며 믿지 않는 자를 그들의 재판관으로 세웠습니다(6),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10). 그들은 술을 마셨고 주님의 만찬을 질서 없이 지켰습니다(11).

그들은 부활에 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중 앞에서 잘못 가르쳤고 여자들이 가르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14, 16).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린아이이며,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 행한다고 말했습니다(3:13). 고린도 교회는 사도행전 19장 이후의 그리스도인들로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때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일에 성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80 11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