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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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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26. 17:11 빛 가운데로 걸으며

제자 됨의

오수웅

마가복음 8 27~34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더러는 어떤 선지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몸된교회가 세워질 것을 증거하고 있는 사실들을 봅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주님은 비로소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공포하실 때 사단은 베드로를 통해서 만류했지만 주님은 이 베드로에게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지옥에 가지 않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 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구원받은 은혜를 가지고 가는 삶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본향은 하늘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의 삶이 하늘의 본향이 목표입니다. 구원받은 즉 몸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주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각자의 몫에 달려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아무든지라 하시며 주님은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선택으로 주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무조건 나를 따르라! 돌격 앞으로가 아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헤롯이 도시를 아름답게 건설해서 로마황제 디베료 가이사에게 이 도시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이 가이사랴입니다.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가이사에 자기 이름인 빌립을 써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충남에 세종시를 개발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로 세종대왕이 훌륭하신 분이기에 그 사람의 이름을 따고 도시를 세우는 이러한 세상의 것들은 주님과 관계가 없으며 관심이 없습니다. 그 도시에서 주님은 세상 사람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이 패역한 도성의 수많은 인생들에게 주님이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구원자이며, 메시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너희를 구원할 자라고 증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누구나 다 하늘나라에 가는데 한 사람도 제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구든지(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강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두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번째는 나를 따르라 입니다. 이 세 가지 주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 우리는 진정한 제자됨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죄를 버리고 따라오라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해서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보혈의 피 공로로 이루어진 구속의 은혜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죄로부터 오는 유혹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기호식품이나 오락이나 취미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성도가 운동을 한다고 해서 죄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 날에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나 골프를 하러 간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됨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허용될지라도 자기 스스로 부인하고 끊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서 사람의 모양,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자기 의지대로 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일을 다 했다고 해서 자기의 권한을 누릴 형편이 아닙니다. 그는 그 일들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히브리 종의 모형을 찾아봄으로써 진정한 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21 2~6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남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히브리 사람의 종을 사게 되면 그 종은 6년 동안을 그 주인을 위해서 일하지만 7년째 되는 날은 속할 것을 말씀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율법이었습니다. 이 종이 6년 동안 종의 일을 마치고 자유하게 되는 그 시간에 주인에게서 나가도 아무런 법적인 제제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제가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의 사랑과 내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 평생 주인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하는 맹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종의 의사를 확정한 다음에 그 종을 재판장에게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가 그 종의 귓볼에다가 구멍을 뚫는 것입니다. 송곳으로 귀가 뚫린 히브리 종은 이제 영원히 그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희생은 그 주인과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사랑과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그 얼마나 고귀한 사랑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나는 죽일 권세도 있고 죽을 권세도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종으로서의 본을 이 땅에 오셔서 보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기도 속에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거룩한 생축으로 드려지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산 제물이 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면 몸은 여전히 죄악가운데 있으며 불쌍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늘에 있으며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으로서의 삶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좋은 그 나라의 세계를, 그 부활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부활이나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자리가 애벌레로 수년간을 살고, 번데기로 땅 속에서 살다가 변태해서 성충이 되어서 날아오를 때 하늘로 그 아름다운 망사의 날개를 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창공을 차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물과 모든 사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합니다. 여름 동안 예비하는 개미에게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배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반은 집이 없지만 바위 속에서 안전하게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거대한 삵이 닥쳐올지라도 그 매맞은 틈새에 벌어진 곳에서 바위틈에 있는 사반은 안전함을 얻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를 해할 수가 없습니다. 약하지만 안전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첫번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사도 바울이, 종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두번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들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병마나, 가정적인 현실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자조적인 의미로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야지 하는데 이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왜 지셨습니까? 주님이 그 고난과 슬픔을 감내하고 끝까지 골고다 산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서 승리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고 죽으러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은 내 십자가를 졌다고 하셨으며 너희는 너희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프고 병듦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끝난 삶입니다. 이제 그의 삶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며 카운터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과 자신이 완전히 결별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그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 앞에 우리는 이 세상과 끊어졌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욕망이 없습니다. 어떠한 갈망도 없습니다. 세상 욕심이 더 이상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욕망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유대인과 율법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쳤습니다. 우리 조상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이러한 문화와 역사요 종교요 신앙인데 스데반은 이 성전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한 것입니다. 이후에 2천 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말씀이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스데반을 돌로 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한 첫 순교자로서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내가 보노니, 주님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도의 죽는 것을 귀히 여기신다고 하는 말씀을 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위해서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1 12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사람들은 거기 올라가면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도 하였다고 증거하고 기꺼이 믿음으로 그 길을 향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죽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좋은 것들, 사랑하는 것들, 취미적이고 기호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갖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좇는 것이 아니고 학문이나 철학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 것들 즉 육신적인 것들, 철학적인 것들, 문학적인 것들, 종교적인 것들, 정치적인 것들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된 삶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우리는 누가복음 10 39절이나 요한복음 11 32절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는 이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나와서 한근이나 되는 향유를 깨트려서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어떠한 훌륭한 지도자나 목회자나 어떤 집회나 어떤 종교사찰에 가서 수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와 같은 삶을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 자매 마르다는 일이 바빠서 불평하고 짜증내지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나와서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발 앞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 주님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그분을 정확하게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 향유를 깨트린 마리의 이러한 행위는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가 행한 일도 전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됨은 남녀 구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이것은 내가 살기 위한 길이 아니라 죽기 위한 길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헌신된 믿음을 통해서 평가하실 것입니다.

백보좌 심판에서 죄인들은 심판으로 둘째 불못으로 넣어지는 심판을 받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앞서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입으로 직고하며 우리의 행한대로 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제자의 삶,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주님을 좇는 삶에서 냉철하고 정확하게 평가하고 우리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제자의 삶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이러한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본향은 하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것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본은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요, 제자로서 주님이 걸어가셨던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된 말씀을 통해서 순종하며 증거할 때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010 5 21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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