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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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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28. 11:45 빛 가운데로 걸으며

복음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생명을

원태수

누가복음 13 22~30

22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이미 구원 받은 분에게는 복음은 아주 상식적이고 이미 구원을 받으셨기 때문에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구원을 흔들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심가운데로 빠져 들기를 원하지 않으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주님을 나타내어 말씀하실 때에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구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공표하실 때에도 그 말씀을 하셨으며 그리고 사사기 2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날 때에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구하여 낸 나 여호와 하나님을 버려라고 해서 하나님을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구하여 내신 여호와와 연관을 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나 명기를 보면 그러한 표현들이 종종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 역사하셨던 이 하나님이 왜 그 이후에 필요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몸된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말씀들이 나온 지 꽤 되었습니다. 그것을 실행하는 분들이 계시고 또 실행하다가 이상하게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관심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잘 실행하다가 곁길로 나갈 가능성은 어느 모임이나 다 있습니다. 또 처음에 잘못되었다가 말씀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모임도 어느 모임이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구성원들이 이 두가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점점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러한 관점에서 교제를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 구원답게 하고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는 복음관 관련해서 많은 진리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온 것처럼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해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요약할 수 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다양하고 풍성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것을 요약하면 사도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 내용을 그 내용답게 하고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더 가치가 생기겠습니까? 성경이 말한 내용을 제시 받을 때에 그러한 것들이 생길 것입니다.

성경은 4복음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역사와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 편지들 가운데도 복음이 있는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풍성한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갈라디아서는 복음과 율법이 합쳐지려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것을 끊고자 하는 바울의 기도와 의도로 쓰여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성한 가운데서 조금 전 누가복음서를 읽었습니다. 이 복음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됩니다. 이 복음의 시작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없이는 그 이후에 말씀도 동일한 원리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무관심하거나 듣지 못해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혹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듣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그것을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따를 힘이 없겠습니까? 복음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말합니다. 이것에 우리가 도출되기를 원합니다.

22절부터는 모두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과 저희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말씀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어떤 힘과 어떤 근원을 가져야 되는지를 연결시켜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여행 중에 계십니다. 여행은 지금 생각하면 매우 한가롭고 즐겁게 생각할 것이지만 주님의 여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가장 잘 알고 계셨습니다. 종종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떡을 떼거나 잔을 드시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부터 시작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예루살렘 입성까지 진행이 되는데 각 복음서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9장부터 시작되고, 승천하실 기한이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결심한 시점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는 것을 알고 거절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자 하시지만 처음부터 거절 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입성하시기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거니 라고 누가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언급을 하면서 뒤에 언급한 내용이 두 군데가 나옵니다. 하나는 조금 전 읽은 이 말씀이고 또 하나는 17 1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지만 그 길로 직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하시면 요단강을 건너기도 하고 여기저기로 다니시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이라는 목표점을 두고 여행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는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을 언급하면서 어떤 일을 말씀하신 두 가지를 인도 받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를 보면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 때에는 세계 인구 중에 여덟명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네 사람이 나왔는데 세 사람만 살았습니다. 엘리사 때에는 엘리사에게 나온 이방 남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으로 공양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죽하셨으면 까마귀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좁은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특징을 말씀하시는데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적다 많다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다른 성경에서 적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많다 적다보다도 네가 들어가야 한다는 이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으니이까?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일반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 자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대답하셨는데 주님의 대답은 개인적입니다. 저희들이 복음이라고 알고 있는 상식의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믿으라, 주님을 따르라든지 이러한 말씀이 나오지 않고 여기서 주님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공통된 주제가 하나 있는데 이 주제를 연관시켜서 말할 때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아주 균형있게 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모순되지 않으면 상호보완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 사람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고 그렇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 사람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 사람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으며 상호 보완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온 부자청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바늘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작은 문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낙타를 분해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작은 문을 말한다고 합니다. 문맥에서 보면 그 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바늘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데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은 건강한 자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길가는 사람에게 구원이 너무 커서 구원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쥐어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손에 받고서도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중히 간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다가 그것을 팽개쳐 버릴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절대로 구원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주님은 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측면에서 복음에는 이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평시에 잘 생각하지 않는 이 면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해치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사람 측에서 무언가 노력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확실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구원 얻는 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많은 형제님들이 교제하듯이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좁은 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좁은 문은 너무나 좁아서 사람이 죄의 짐을 가지고서는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죄 짐을 다 내려놓고 통과할 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그 사람의 의도, 계획, 기쁨, , 관심, 재미이러한 것들을 가지고서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계속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은 이 구원의 가치를 입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라는 말을 설명드리면 달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라토너가 목표를 두고 달리는데 있어서 그 목표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사람 측에서 무언가를 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 측에서 그 구원이 최우선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멸망하는 것이 정말 두렵다 하면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의 것도 놓치기 싫습니다. 좁은 문은 그 두 가지를 가져가지 못합니다. 좁은 문은 사실 그 사람의 육이 죽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통과하지 못하는 문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을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때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원리가 그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진행하는데 필수적인 생명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겠습니까? 저 자신과 다른 여러 사람들을 생각할 때 구원과 연관시켜서 생각이 됩니다. 물론 중점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자신을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힘이 어디서 공급이 되어야 되는가요? 주님으로부터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로서 뒤에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이 열려 있어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은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는 그 주인의 손에는 못자국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는 한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어느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이 문을 닫은 후에 어떤 사람들이 갈망하는 어떤 모습 즉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연계해서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는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통과하지 않는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 즉 이 사람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길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에 젖어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좁은 문으로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이렇게 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에 이렇게 되는 사람이 지금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금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현재 문이 열려 있을 때 그 문의 가치를 배척하고, 그 문에 주의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 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너무 늦게 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너무 늦은, 이 늦음은 늦게라도 순종하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다라는 늦음이 아니라 문이 닫히는 늦음, 그런 늦은 상태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들이 늦었지만 문을 이렇게 간절히 두드리는데 주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주셨다면 물론 한 번 닫은 후에는 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한번쯤 이 사람들에게 열어주면 어떻겠는가? 이게 정말 사랑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절대로 그 사람들에게 열어주실 수 없습니다. 열어주실 수 없는 이유는 이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고 천국에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내적인 변화가 없이, 하나님의 성령의 변화시키는 생명의 실제적인 역사가 없이 모양을 어떤 것으로 갖추려고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절대 용납하실 수 없기에 나는 너희가 세상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람의 출처를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버지께로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도, 하나님을 위한 어떤 일도, 하나님을 위한 삶도 반드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것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구원을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받아드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내 몸이 지옥이라는 그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천국이라는 아주 행복하고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주님은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간다면 천국은 당장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천국의 의미는 그 중심에 누가 계시느냐 하는 것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나를 떠나가라. 나로부터 분리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으며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생각한다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길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는 악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선을 발견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악입니다. 형제 자매님들은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은 죄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자기의 기쁨이나 자기의 계획이나 자기 뜻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미래를 말씀하셨지만 그 사람들의 특징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문을 통과하기를 구하거나 원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으면 주께서 그 영혼에게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물들이 보일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려고도 합니다만 분명히 방해물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것입니다. 이 방해물을 그대로 놓아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이 사람의 특징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예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주님과 함께 수백만의 사람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백만은 바깥에 있는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 적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의 숫자에 연연하며 사람이 많으면 무언가 안심이 되는 것처럼 합니다. 주님은 군중의 특징을 누룩이 퍼지는 가루로 보았으며, 새가 깃드는 큰 나무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을 때에 힘을 얻습니다. 주님을 말씀하시기를 군중은 조그만 누룩만 들어가도 바로 확 퍼지는 특징을 가진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 군중은 양적인 크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사단이 거하든지 무엇이 거하든지 주의하지 않는 아주 전염이 잘되는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주님은 전혀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거기를 찾는 사람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일반적인 대답을 그 사람의 어떤 상황에 적용시키도록 하셨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의역하면 실제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내 자신이 좁은 문을 통과해서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은 아는 즉시 들어가야 할 문이며 주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입니다. 언젠가 주님은 이 문을 닫으실 것입니다. 좁은 문이라고 사람들은 불편해 할 것입니다. 너무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문입니다. 언젠가 주님은 못박힌 손으로 이 문을 닫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7 11~19,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를 말한 두번째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도 숫자는 9 1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입니다. 소수기 때문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따르기 때문에 소수라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믿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절대 군중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일도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다르게 권능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권능이 있고 세례요한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시는 상태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시고 정하신 그 길을 순전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증거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숫자에 관계없이 이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말들이 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보면 주님은 이 문둥병자 열 명에게 발견되어졌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필요로 하는 여러 사람에게 그 시간에 맞추어서 주님을 나타내어 보여 주십니다. 이런 기회가 있을 때, 이러한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이 문둥병의 심각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말씀을 따라서 이 당시 존재하는 대제사장이 문둥병을 살펴보고 부정하다라고 선언을 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가장 원하는 말은 동일한 그 제사장의 입으로부터 이제 깨끗해졌다고 하는 선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문둥병이 낫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예를 든다면 이 병이 낫기 위해서 다른 수단을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올바로 찾아왔고 이 문둥병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접근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있었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주님께 호소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네 병이 낳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제사장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깨끗해졌다하는 선언을 들으러 갈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믿고 그 길을 갔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 일으킵니다. 물론 때때로 구원받았느냐 아니냐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들어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병이 나았다는 그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라는 말씀들이 몇 번 나와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있습니다. 소경이 나았지만 그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묻기를 누가 낫게 해 주었느냐? 저가 나이가 들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그 부모가 말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억해 보면 분명히 주님의 기적이 그 사람에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문둥병은 특별히 죄를, 부정을 나타내는 병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인용이 되었고 분명하게 그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의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은 이 사람들의 구원은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가다가 이 사람들은 나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주님은 이 사람과 아홉의 구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1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주님은 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열 사람이 주님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지하셔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아홉 사람이 장소적으로는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이 말은 장소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출처를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아홉 사람은 문둥병이 낫기 이전에 주님에게 온 모습 그대로 주님의 역사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주님 앞에서 잃어진 자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저희들에게 대단한 도전과 어떤 의미에서 충격을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연결된 어떤 특징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 어떤 말들을 잘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이 주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대한 특징은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판단을 하고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판단으로 그런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고 분명히 주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서 분별을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도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잃어진 자입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교회에 관련된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합니다. 그 실행이 주님과 연결되지 않은 가운데서 한다면 성도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을 주신 첫번째 이유는 주님과 연결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사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미래의 특징들에 대해서 말할 때 감사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특징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며 감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돌아와서 사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연결이 기초가 될 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여기 나오는 한 말씀을 상고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다음에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13장에서 말씀하신 나를 떠나가라는 말과는 전혀 내용이 다릅니다. 성경에는 가라는 말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노아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방주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서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어떤 곳으로 가라 하는 지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네 고향 네 친척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그 친족 고향 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시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어떤 영역으로 출발하는 의미로 가라라는 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언급해 드리면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에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과 들어간 이후가 다른 것이 있는데 매키온 형제님이 세가지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하나는 예배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단을 쌓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았습니다. 이 성경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나, 창세기 출애굽기가 왜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구약에 기록된 것들을 사도바울이 말할 때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구약은 그림자로서 신약은 실체로서 하나님의 교회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 교회시대 사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 성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 교회시대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모든 말씀들을 기록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창세기는 나를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살펴볼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신약의 영역은 하나님의 지역교회입니다. 지역교회를 떠나서는 절대로 예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생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단을 쌓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은 지금 이 시대는 지역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대라고 하셨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영혼에게나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나타나 이르시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영역에 들어가야 가능합니다. 주님의 교회의 첫 출발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아브라함에게 말씀만 하셨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장막에 거했다는 것입니다. 행인과 나그네의 올바른 삶은 어디에서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 가능합니다. 그 전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행보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인으로서, 나그네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참조하시면 하나님의 지역교회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책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매우 풍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이 없다면 그릇 살인한 자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피성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릇 살인한 자가 살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을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 속에는 사람의 책임이 있는데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자기 발로 도피성으로 뛰어가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보수자에게 죽어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가라는 말씀이 곁길로 센 것 같습니다만 이런 의미에서 가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연관해서도, 야곱을 향해서도 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형을 피해서 약속의 땅을 벗어나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 친족에게로 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나 어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의해서 야곱이 자기의 본향,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듯이 그런 의미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모세의 경우는 애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표현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7장의 가라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문맥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3장에서 회개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망대의 무너진 것과 빌라도가 저지른 어떤 일에 대해서 나옵니다. 주님은 회개가 아니고는 절대로 참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일 때문에 거기에 마음이 빼앗기지만 그 일보다 더 심각하고 실제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사람이 적으니이까하고 묻기 이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대항하려고 주님을 대적하는 어떤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군중들은 주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주님은 군중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어떤 병을 고친 사건이 그 앞에 나오는데 그 일에 대해서 회당장이 화를 낸 것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 회당장도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특히 지도자들,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질문한 사람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주님을 따르는 12제자들과 그리고 주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지식인, 지도층,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 사람은 구원을 얻는 숫자에 대해서 아마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라면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왜 소수만 주님에 대해서 진정한 반응을 하겠는가에 대해서 갈등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런 질문들이 나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면 17장은 어떤 배경에서 이러한 말들이 나왔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선 1절부터 보게 되면 형제들에 대해서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형제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형제를 실족케,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심판은 지옥 보내는 심판은 아니겠지만 이 심판의 두려움은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어서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은 자에 대한 모든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관련해서 말씀하시면서 회개한 사람에게는 하루 일곱번 죄를 얻고 일곱번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을 생각할 때 앞에 내용과 연관된다고 보여집니다.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면 엄청난 대가가 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형제가 일곱번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려고 할 때 큰 부담이 되었기에 거기에 대한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주님께 호소하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때에 겨자씨에 관련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습니다만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은 크지만 생명이 없으며 돌 같은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교제한 내용과 일치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주위에서 이 생명을 억압하려고 할지라도 이 생명은 그것을 뚫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이 수고했으니까 내가 먹을 것을 줄 테니까 여기서 먹고 마셔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먹고 마시는 것을 수종들다가 나중에 먹고 마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고 나서 10절에 이와 같이는 문맥을 통해서 보면 앞에 것처럼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의 핵심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 의무적으로 봉사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무익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할 마음은 있지만 제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는 무익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사용해 주신 것, 기회를 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적이고 명목적이고 의식적인 봉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맥에서 왔다면 물론 10명의 문둥병자가 나은 것은 복음적인 문제와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참된 헌신의 모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헌신은 무엇인가 주님께 봉사하고 섬기는 것인데 우리가 봉사와 섬김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서 사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구원의 시작이자 헌신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헌신의 한 내용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결이 없이는 그 사람에게 생명적인 공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그 이후에 진행이라던지 진보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역교회로서 출발하였습니다. 진보를 원할 것입니다. 무엇을 확인해야 되겠습니까?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능력과 권능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17장에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과 주님과 실제로 연결된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하는 것과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께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고 바깥으로 계속 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만찬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찬을 기본으로 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증거가 증거될 것입니다. 만찬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이 연결이 있어야 그 이후에 증거가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 가라 그래서 이 사람은 늘 주님과 연결 된 가운데서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0 5 21일 의왕모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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