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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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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1. 13:35 횃불/1988년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 10:30~37)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난 길은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산적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는 길이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극히 적었으며, 오늘 날로 말하면 경찰이나 군인들도 거의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을 연결하는 통로는 오직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길을 택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사막 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산적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를 헤쳤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벗긴 후, 의식을 반쯤 잃은 채 피를 흘리는 그를 그냥 버려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곳을 따라 내려오다가 흙먼지 속에서 몸을 비틀고 뒹구는 그 희생자를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대개는 제사장이 그를 도와주었을 테지만 자기 목숨이 그런 위험한 광야에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던 길을 서둘러 갔습니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자기 목숨이 더욱 위태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통행인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이 유대인의 직업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을 보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명백히 응급조치를 필요로 하는 강도의 희생자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하다간 올가미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멈춰 서서 희생자를 도와줄 때 산적들이 그에게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타고 그 결을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아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편견과 경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대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피차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재난을 당한 유대인을 보았을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종적인 편견과 자신에 게 닥칠 위험도 잊은 채 상처를 씻은 다음,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을 자기 나귀에 싣고 길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를 계속 돌봐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사마리아인은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관 주인에 게 돈을 주면서, 상처입은 유대인이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일 돈이 모자라면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 나머지를 갚아주겠다고 그는 약속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 자리잡고 있던 악감을 감안할 때 사마리아인인 그가 유대인에게 그와 같은 자비를 베푼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

주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가르치시고자 하는 어떤 특별한 교훈을 언제나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경우에는 주님께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서기관에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서기관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고 질문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회피해 보려 했습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그의 질문에 답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에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갖는 주된 교훈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또 절대적인 필요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이 어떻게 자비를 베푸시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입니다. 이 비유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과 얼마나 흡사한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강(평화)의 성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남쪽의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 강 옆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평강의 성을 떠나 죽음의 성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4:12).

이처럼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는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아래로 내려갈 때 곤경 속으로 뛰어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은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고 말합니다( 13:15). 죄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을 낳습니다.

강도들이 그 가련한 사람을 약탈한 것처럼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정결함과 기쁨과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상해하고 거반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갔습니다. 이것은 죄가 인간의 삶 속으로 가져오는 심통(心痛)과 비참, 죄의식, 흔적, 후회 등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댓가를 지불할 날은 틀림없이 찾아오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때문입니다( 6:23).

 

율법과 은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지나갔지만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교훈을 시사합니다.

첫째로, 죄인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의지할 바가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은 헛됨이니이다.”( 60:11, 우리말 성경에는 사람의 구원은으로 나와 있음 - 역자주)

둘째로, 설교자나 제사장이나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대표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임명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특히 십계명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십계명을 주셨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인간의 얼굴이 더럽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인간의 얼굴을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사점을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주님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날 때부터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이 마치 사마리아인인 것처럼 그분을 멸시하고 배척했습니다. 한 번은 그들이 그분보고 실제로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습니다( 8:48).

주 예수님은 그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절대적인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잃어진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늘을 떠나 이 죄악의 정글로 오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그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그처럼 도와준 것은 참으로 자비로운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자비로운 행위는 생명과 영광의 주님께서 경건치 못한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하려고 육신적으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사랑과 희생

선린 사마리아인은 자기 목숨을 위험에 내맡긴 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위험에 내맡기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실제로 내어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2:20)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에 누워 있는 희생자의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상한 심령을 고치시며, 영적인 소경들을 보게 하십니다( 4:18).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쏟아부은 기름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 죄로 상처 입은 삶 속으로 기름과 포도주를 쏟아 부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길에 그대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른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속으로 이끄십니다. 만약 우리가 혼자만 따로 있게 된다면 우리는 죄에 빠질 위험에 항상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올바르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강건해질 것입니다.

여관을 떠나기 전에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또 우리에게 교회를 주셔서 가르침과 교제와 기도집회와 주님의 만찬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날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또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 영원히 자기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구주께서 곤경에 처한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해주셨는가를 잘 보여주는 아름답고 정확한 그림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오늘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세 종류의 철학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네 것은 내 것이니까 이리 내놔.”- 이것은 강도들의 철학이었습니다.

둘째로, “내 것은 내 것이니까 남에게 줄 수 없다.” -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철학이었습니다.

셋째로, “내 것은 네 것이니까 나는 내 것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 -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철학이었습니다.

 

(1988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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