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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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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8. 16:57 횃불/1989년

우선순위를 지키는 부모(2)

- A. J. 히긴스

자녀들을 인도하기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아, 마므레 평지의 순례자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한 그 방문객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18:19).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율법은 그 사이사이에 부모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삽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부모들은 그 진리들을 가족들 앞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자녀들에게 율법을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은 물론( 6:7)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러 상황에서 성경귀절을 경건하게 인용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들과 원칙들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흔한 활동들은 성경 말씀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성경 말씀을 일상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 여론을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라 저울질해 보는 것, 다른 사람들의 처세를 성경의 기준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가치 기준을 향상 시킵니다.

이스라엘 가정의 아버지들에게는, 후일에 태어날 세대들이 자기 민족의 영적인 역사에 관하여 아버지에게 물을 때 그것에 대해서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도()를 교훈하는 것은 가정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치 체계를 불어넣는 일과, 생각할 대상(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법(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까지 가르치는 일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를 즉시 인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렇게 연약해 보이는 아이도 얼마 안되어 곧 냉소적인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성품과 진실한 삶 때문에 받게 될 공격과, 믿음 때문에 받게 될 공격에 대해서 그들을 준비시켰습니까? 성경 말씀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참을성 있게 적용하는 일과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들을 합당하게 준비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느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십니다. 교회의 인도자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경외감마저 듭니다. 인도자들의 삶의 모든 면에는 자기 자녀들을, 영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준비시키는 일도 포함됩니다. 자녀들을 이처럼 준비시키는 일은 양친이 함께 책임져야 할 전임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책들에게 기여해야 할, 독특하면서도 매우 귀중한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그런 책임을 그저 우연에 맡긴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우리 부모들은 증대해가는 책임과 준비의 영역으로 자녀들을 이끌어 갈 책임과 특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산을 남기기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과 그들을 인도하는 것의 결과는 자녀들이 사용하여 세울 수 있는 부요한 유산(遺産)이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유산은 유언장이 읽혀진 후 법정대리인에게서 받는 유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무형의 유산이면서도 어떤 물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유산입니다. 주님께서 그 때까지 오시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 유산이 살아생전에 우리의 눈 앞에서 사용되는 것을 실제로 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자 곧 등극(登極)하기로 되어 있는 어리고 연약한 솔로몬을 보고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여 자기 아들을 위해 준비하기로 결심했습니다(대상 22:5). 역대상 22장에서 다윗은 솔로몬 자신을 준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건축하게 될 성전을 위하여 물자들도 역시 준비했습니다. 다윗의 선견지명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준비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남겨놓은 물질 유산도 사실, 솔로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산을 자기 아들에게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에게 믿음이라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의 믿음 생활은 믿음에 감동된 아므람과 요게뱃이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는 말과 더불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상자 속에 넣어 물가에 두었는데, 우리는 그들이 모세를 상자 속에 넣어 물가에 두면서 어떠한 경외심으로 그 어린 아기를 하나님께 맡겼는지를 그저 상상만 해볼 뿐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모세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모세를 일컬으실 때 믿음으로 모세는이란 표현을 세 번씩이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하여 모세에게 얼마나 자주 이야기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심어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격려해준 그녀의 지대한 영향은 측량키 어렵습니다. 오네시보로에 관한 이야기는 디모데후서 1:16-18에 겨우 세 구절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원히 존귀한 위치를 얻었으며, 자기 가족에게 큰 축복을 갖다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행실로써 남겨둔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락한 셋집이 아니라 축축하고 어두운 땅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 체재 속으로 던져져 다른 범죄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 때 바울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해 주었던 친구들은 이제 그를 피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큰 위험과 댓가를 치뤄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만 친구가 되어 주었던 이 사람들은 배교자들이 아니라 아마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그와 연루되기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들의 동기가 다 드러날 터이지만 바울은 저희에 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딤후 4:16). 이처럼 어두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오네시보로는 하나님을 위해 한층 더 빛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은 오네시보로의 헌신을 더욱 밝게 조명할 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기 앞에 있는 장애물들, 혹은 로마에서 수행해야 할 그의 사업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찾아가 만났으며, 그의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점에서 그의 용기를 보게 되며, 그가 바울의 힘을 종종 북돋아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동정심과 보살핌을 보게 됩니다. 그의 양심적인 관심은 바울에게 감지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가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다 간략하면서도 감동적인 그림을 더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오네시보로가 고난을 당하는 바울을 섬김으로써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에 있을 때 조차 그의 일관된 습관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못됩니다. 이 믿음의 영웅이 살아 있었는지 주님과 함께 있었는지는 중요한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삶의 결과로 축복이 그의 가정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윗처럼 자기 가족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삼하 6:20).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유산들을 남겨주신 부모님들을 회상해 보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많은 가족들은 누가복음 12:13에 나오는 그 형제들처럼 더 많은 물질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유산 때문에 신랄한 말과 화해될 수 없는 감정들이 형성됩니다. 이들에게는 재산 낭비와 비극적인 결말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부모가 남겨주는 무형의 유산은 주님의 축복처럼 자녀들을 부요하게 하고, 그 항로에 슬픔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일관된 삶의 경건한 본, 시련 가운데서 나타내 보이는 변함없는 성품, 개인적으로 손해를 당하면서도 성경의 원칙들에 집착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 이 모든 것들은 땅의 기준으로는 결코 평가될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을 만들어냅니다.

이와 같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자기 가족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기만 하면 아버지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동하려는 도시에 성서적인 교회가 없기 때문에 승진이나 전근을 희생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주님을 위해 살도록 양육하기 위해 세상에서 출세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실정입니다.

가족의 유대감을 증진시키는 일에 관습의 가치는 간과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이것을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물질주의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과 시간을 얼마나 쓰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됩니다. 이를테면 공휴일이나 생일, 또는 다른 특별한 날과 같은 관습적인 날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특별하고도 의미있게 느끼게 만듭니다. 이런 날들을 기억해 주는 것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유대를 형성합니다. 자녀들이 장성하여 부모의 통제를 벗어날지라도 그것은 가족들을 의미있게 묶어 주는 끈이 됩니다. 각각의 가정은 관습적인 날들과 특별한 날들을 각자에 맞게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한 공휴일에나 생일날에 가보고 싶은 장소를 방문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녀들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장차 있을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발할 때 그들에게 부유한 유산을 남겨주게 될 것이며, 그들은 이것을 의지하여 장래에 대비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부모된 우리들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1989 3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