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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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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8. 17:02 횃불/1989년

교회 안의 젊은 그리스도인들(1)

리챠드 잉글리쉬

어떤 세상적인 활동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곳들(이런 곳에는 사람들을 구주에 게로 인도하는 구원의 역사가 없습니다.)을 제외하고 많은 교파의 집회에서는 요즈음 소수의 젊은이들만 찾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세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서적인 지역교회에는 열성적이고 활동적인,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교회의 장래가 바로 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 형제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그들을 돌보고 또 그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입에서 이것이 정도(正道)이니 이 길로 행하자라는 고백이 절로 튀어나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장로 형제들의 목표

장로 형제들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잘못 돌보다간 자칫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장로 형제들의 태도를 우리는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의 장로 형제들은 자기들의 임무가 양떼를 전제군주처럼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약한 어린 양들에게 가끔씩 충고의 말을 들려주는 일에 있어서나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할 따름입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장로 형제들은 신진 세대들과 그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섬김의 방법들을 언제나 미심적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제안하는 방범들이 시행된 적이 과거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20세 이하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활동이라도 할라치면 이것으로 인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장로들의 반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 형제자매들은 복음집회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요.”

반면에 둘째 부류의 장로 형제들은 젊은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다시 말해서 젊은이들을 너무 믿는다는 뜻임-역주). (이런 사람들 중에는,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젊은이들처럼 기백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장로들은 어린 형제자매들이 아무리 합당치 않은 제안을 할지라도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교회의 집회 장소와 재정이 그 제안에 제공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혹 어떤 사람이, 좀더 낫고 현명한 방법(예를 들면, 그들의 태도와 자기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태도 사이의 중도(中道)에 있다고 제안이라도 할라치면 당장에 이런 사람은 젊은이들을 격려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로 정죄받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할 때 독재주의와 무절제 사이를 평온하게 항해(航海)해 갈 줄 아는 장로 형제들이 교회에 몇 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이런 장로 형제들을 영적인 상식에 의해 필요하다고 분별되는 대로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을 동일하게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섬김은 여러 형태를 띠게 마련인데 장로들은 모든 일에 책망 받을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장로들보고 깨어 있으라”(Vigilant)고 말합니다(딤전 3:2, 우리말 성경에는 절제하며로 나와 있음-역주). 이 특성을 소유한 장로들은 어린 양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여 그들을 올바른 길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장로의 지위를 존중하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일에나 그들로 하여금 장로들의 역사(役事)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게끔 하는 일에도 깨어 있습니다(살전 5:13).

장로들이 고린도전서 8 9절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자유가 연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자신의 처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제사장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가장 신성한 임무는 아마 공적인 기도와 찬양일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의 말은 양떼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장로 형제들이 사용하는, 신학적이고도 긴 설교투의 말로 인해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집회에 불참하고 있습니다. 기도시간에 그들이 아버님께서 아시나이다라든지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읽는 바와 같이라는 표현을 간간이 사용함으로써 역시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이것은 분명해집니다. 만일 그들의 기도가 열렬하고 효력 있는 것이기만 하다면 젊은 그리스도인이건, 장성한 그리스도인이건, 기도가 길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열정이 빠져 버린 기도라면 아무리 길게 드릴지라도 사람을 의롭고 신령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지 못합니다.

또 장로들은 가르치기를 잘 해야합니다. 그들은 이 면에 있어서도 잘 분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 아침에,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어서 말을 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일입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인 마음으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무언가 꼭 이야기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형제가 누구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차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또 누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하는 줄도 역시·빨리 분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더 잘 아는 형제들이(딤전 3:15) 일단(一團)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장을 관철케 하여 집회장소를 소란한 장소로 만들도록 용납하는 것은 우리 주님을 얼마나 욕되게 하는지 모릅니다. 불순종 및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이 득세하는 모습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한 징조입니다만(딤후 3),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는 그렇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의 합창이 그저 외치기 시합으로 전락해도 그냥 용납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이에 반해 들에게 주어진 기회가 올바른 길로 인도되는 경우는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장로들은 여러 집회에서 사용되는 합창과 찬송에 있어서 큰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합창들이 재즈 곡조에 너무 물들어 있으며, 신성(神聖)한 낱말들도 역시 기피되고 있는 관계로 재즈에 젖어 있는 마음들에게 거의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어떤 찬송들은 너무 구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곡조들이 너무 서로 흡사한데다가 또 너무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는 제재(題材)를 통해서건, 변화 있는 활동을 통해서건, 흥미진진하고 활발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경험이 특별히 요구되어지는 집회라면 할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이런 일에 소질을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부탁하여 집회시간에 일익을 담당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젊은이들을 적절히 통제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만일 이 방법을 꾸준히 사용한다면 그들은 더 장성한 세대로부터 배우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법도 스스로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자기보다 나이든 성도를 실제로 도와 왔고, 또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오지 않았다면 이처럼 가르침을 받지 않은 젊은이에게 책임 있는 자리를 맡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 다음 호에 계속 -

 

(1989 4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