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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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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0. 20:04 횃불/1989년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1)

R. G. 로포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쟁론하시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5:19). 나중에 동일한 강론에서도 그분은 같은 가르침을 반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5:30).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78)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를 살펴볼 때에도 우리는 요한복음 5:19의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많은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19의 문맥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주님께 고침을 받은 병자의 간증을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이 병자는 38년 동안이나 자기를 괴롭혀온 그 질병에서 해방을 받고 싶어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에 있는 연못 곁에 누워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에게 어느 안식일 날 한 낯선 사람이 다가와 친절한 말씀을 하시며 관심을 표명했을 때 그의 기쁨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시간까지 그는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하는 능력을 부여 받아 자기가 고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던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소망 없는 상태와 고침을 받고 싶은 소원을 거리낌없이 말했으며, 주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5:8). 이 사람은 순종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자기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 일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격분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마주 대하시고, 아버님과 아드님의 관계를 객관적인 말로 묘사하셨습니다. 18절과 24절에 나온 그분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아드님의 영광과 능력에 관하여 그분은 아들이····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는 말로 자신의 강론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표준

이 강론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과 더불어 세 가지의 매우 중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중 첫번째 것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입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인간의 표준은 그 당시도 오늘날과 같았습니다. 이 표준대로 한다면 육체의 힘이 있는 사람, 용감무쌍한 사람, 정권을 장악한 사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권세)에 대한 주님의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은 자기 아버지의 모범과 인도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표준은 사람들보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라고 격려합니다. 자신의 뜻이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양도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세상의 표어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해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는 이와 같은 표어가 결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닮아야 하는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표준을 배척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지니는 엄청난 의미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분이 자기 아버님의 뜻을 벗어난 일을 단 하나라도 행하셨다면 그분은 독립을 주장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드님(성자)의 뜻은 아버님(성부)의 뜻과 온전히 일치했으며, 이와 같은 연합 때문에 그분은 결코 아버님(성부)의 뜻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삼위일체의 연합(하나됨)이 깨어졌다면 두 개의 뜻(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이 존재했을 것이고, 두 개의 주권과 두 하나님이 존재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드님(성자)께서는 그와 같은 상황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온전한 종으로서 아버님(성부)과 늘 온전한 교제 가운데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무결성과 하나됨은 언제나 온전히 보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람은 얼마나 대조적인지 모릅니다!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꾀임을 받았습니다. “너희가····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5). 그러자 얼마 안되어 그녀는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 이래로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관점이나 선호(選好)를 밀고 나아갈 때 그것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의 계명이나 지시를 불순종하거나 무시할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님을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 )을 사망의 위치에 두어 지켜야 합니다. 설혹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복종이 결국 우리를 현재의 환경과 섬김의 영역 너머로 데려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바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의 복종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참으로 따라가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1) 성경이 무미 건조하다고 느껴지고, 모든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소홀히 할 때.

2) 시기심이나 쓴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이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형제들이 자기를 더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칭찬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3) 자기 가족이나 형제들이 자신의 좋지 않은 습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달갑지 않게 느낄 때.

4) 우리의 삶 가운데에 밀어닥칠지도 모르는 역경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선하심에 회의를 품기 시작할 때.

이상과 같은 것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자백하고 그분의 뜻을 알려고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님(성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교제가 어찌나 온전했든지 우리 주님의 말씀과 행동은 성부의 마음의 온전한 표현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복음 5:20이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성부께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성자에게 모든 것을 세세히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및 성품을 묵상하는 것과 기도를 통해 그분의 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과 자주 교제를 가지는 것만이 우리가 그분의 목적과 그분의 본체를 이해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조용한 교제시간을 갖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의 생각은 때때로 세상적인 논리로 더럽혀질 때가 있으며, 우리의 삶은 세상의 표준에 영향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 방식대로 하겠다라는, 세상의 태도를 취할 때 주님의 마음은 틀림없이 슬퍼하십니다.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 때로는 오래된 그리스도인들까지 경건한 장로 형제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은 명백한 반항입니다.

또 자녀들이 그리스도인 부모의 지시나 금지사항을 불순종하는 것,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남편의 소원을 무시하는 것도 역시 명백한 반항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정반대 되는, 자신의 욕심과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더욱 명백한 반항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구주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사랑과 순종이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 림이라····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10:17-1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열매이자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다음 호에 계속 -

 

(1989 6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