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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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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0. 12:26 횃불/1989년

기도와 기도집회

C. H. 매킨토쉬

실로 중요한 주제인 기도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로, 기도의 도덕적인 근거에 대해서, 둘째로, 기도의 도덕적인 조건들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기도의 도덕적인 근거를 잘 표현해주는 말씀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7),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그리고 그 복 받은 사도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자신의 호소에 대한 도덕적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3:18).

이상과 같은 구절들과 및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른 많은 말씀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효과적인 기도를 드리려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정직한 심령,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지 않다면,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눈이 성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하여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3).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찌 그와 같은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그 도덕적인 근거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이것은 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그 사도가 선한 양심과 건전한 눈, 그리고 정직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도덕적인 설득력을 갖지 않았다면 어떻게 형제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때 경박하거나 형식적으로 할 때가 많이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시간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그들의 마음 속에 우리가 기억되는 것보다 더 귀하고 축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도덕적인 근거를 충분히 살펴보았습니까? 우리가형제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할 때 우리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그리고 우리 자신이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가운데 정직한 마음과 성한(건전한) 눈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상의 질문들은 우리를 살피게 만드는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 심장의 정곡을 찌르며, 우리의 존재의 뿌리와 도덕적인 동기까지 파고듭니다. 우리는 모든 사항들, 특히 기도에 관한 사항을 철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진실치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으며, 도덕적인 근거들이 심하게 결여되어 있으며, “잘못 구하는일들이 너무나 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에는 능력과 효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러기에 형식과 천편일률, 그러기에 순전히 외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서 불의한 것을 본다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If I regard iniquity in any heard, the Lord will not hear me. 66:18, 우리말 성경에는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으로 나와 있음-역주). 이것은 얼마나 엄숙한 말씀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진실한 것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서 진실을 찾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실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에게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 모습 그대로, 그리고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그렇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간구 아닌 웅변이 될 때가 얼마나 많으며, 필요를 아뢰는 것이 아닌 교리 언급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때로 우리의 기도는 마치 하나님께 원칙들을 설명하거나 그분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우리의 기도집회에 영향을 미쳐 생기와 관심과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 그 가치를 알므로 그 필요를 자각하는 사람들은 기도하기 위해 기도집회에 참석하는 것이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사람들의 웅변이나 강의를 들으려고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강의를 원한다면 강의실이나 전도실로 갈테지만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기도집회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기도집회가 필요를 아뢰고 축복을 기대하는 장소요, 자신의 연약함을 아뢰고 능력을 기대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라는 표현은 바로 그와 같은 개념을 담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들이 기도처에 모이는 것은 설교조의 긴 기도를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런 기도는 강단에서 전해질 때에는 간신히 참을 수 있으나 기도의 형태로 전해질 때에는 실로 참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단순하게 씁니다. 기록하는 것도 단순하게 기록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도와 기도집회에 진실과 진지함과 진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깊이 인식합니다. 소위 기도라고 불리는 것이 기도이긴커녕, 이미 알려진 어떤 진리나 원칙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일 때가 많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자주 들었기 때문에 심히 지루하게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어떤 사람의 원칙 설명이나 교훈 해설을 듣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건가, 아니면 우리에게 말하는 건가?”

- 다음 호에 계속 -

 

(1989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