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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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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2. 15:17 횃불/1990년

왜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는 쉼이 없는 어려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내게 욥기 5 7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어려움이 당신을 괴롭힐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세 아이의 어머니인 젊은 부인이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의사는 그 질병 이 치유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하면서, 긴 기간의 치료를 제안했습니다. 그 젊은 부인은 주님, 왜 내가 이 같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 없습니까? 나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은 건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8년 전 제가 구원을 받은 이후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살아왔는데, 왜 내가 이 같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술을 진탕 마시고, 떠들고 다니는 이웃의 두 부인에게 주님을 증거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그처럼 사랑한다면 왜 하나님이 이 같은 고난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시는가?’라고 말합니다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어떤 도움이 이 젊은 어머니에게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십니까? 물론 돌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주님을 신뢰하도록 하여, 왜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는 지를 설명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아십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를 알고자 하여 기쁘지 않은 상태를 분석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좌절로만 이끌어 갑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55:8, 9)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처럼 크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견지에서 사물을 달 수 있다면 우리는 왜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11:6).

하나님께서는 실수를 하시기에는 너무도 지혜로우시고, 불친절 하시기에는 너무도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조차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며,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건강을 누리며 살도록 허락하시는 지에 대해 의아해 합니다. 시편기자도 불경건한 사람들이 좋은 건강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에 깊이 고민을 하였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73:2~5), 당신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왜 가끔 자기들의 몸을 악용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건강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있습니다. 시편기자도 역시 깊이 통탄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근심에 짓눌리고, 불경건한 사람들이 고난과 슬픔으로부터 면하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암에 걸린 그 어머니는 시편기자가 느꼈던 것처럼 확실히 느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하여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13~15). 아삽은 왜 하나님께서 그가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는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만일 그가 부당한 고난처럼 보이는 이 일에 대하여 그의 가족들에게 말하였다면, 그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어쩌면 넘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생각을 자신에게만 간직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주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부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17,18, 20).

이 하나님의 사람은 악인이 누리고 있던 형통함과 놀랄만한 건강이 단지 짧은 기간동안 지속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꿈과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실제 같았던 즐거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단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제가 다리에 소아마비에 걸린 후 여러 번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고 다시 뛰기조차 할 수 있는 것을 꿈도 꾸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몇초동안 계속되었던 단지 가버린 꿈이었음을 깨닫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형통함과 좋은 건강을 묘사하십니다. 그 시편기자는 악인의 형통함과 건강을 부러워하게 되었을 때에 자기가 어리석은 생각에 빠졌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 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22)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가 단지 인간의 추리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동안 신체적인 건강을 잃었던 사람이었다면 완전한 건강을 즐기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손 안에서 확실하게 붙잡혀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의 많은 종교들은 고난의 실제를 부인하거나 그들의 추종자들이 다른 것을 생각하게끔 노력합니다. 성경은 고난의 실제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축복으로 변형시킬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로마서 8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쓰디쓴 경험들 조차 축복으로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야기의 첫머리에 언급한 젊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난을 통하여 그녀의 이웃들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지켜볼 것이며 결국에는 주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것입니다.

나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잘 나타내었던 어느 상사를 기억합니다. 어느 날 그가 군목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주님을 알게 되었는가를 질문 받았을 때 그 상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나는 어느 그리스도인 군인을 괴롭히는 일을 아주 재미있어 하고,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을 놀리면서 막사에 있었습니다. 그는 놀림 함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기 때문에 야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가 내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군화 한 짝을 집어 들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예수님처럼 그는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나의 군화 한 벌이 내 침대 옆에서 아주 반짝거리며 곧 신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그처럼 잔인하도록 부당하게 대우했던 사람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갚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간증에 대항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 나 자신을 굴복하였습니다.

그 그리스도인 군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웃음거리로 삼고, 그리스도인의 신앙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소홀히 하셨으리라고 아마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운 경험을 통해 상사가 그리스도께 들어오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왜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8).

매일 고통과 고난을 지니고 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나는 1949년 이래로 경험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람들이 고난을 느끼는지를 압니다. 고통이 심해져 갈 때 우리의 마음은 가끔 방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울 필요가 있을 때입니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왔던 주안에서 형제인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 계속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에 대해서 한번도 물어보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가족들 조차도 그 허약하고, 고통으로 약해진 몸으로부터 나오는 불평을 결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 사람의 성경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고정시키는데 필요했던 말씀들이 아주 많이 줄 쳐져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서 26 3절을 우리는 읽었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리고 또한 사도 바울이 신체적인 고난에 대하여 말했던 로마서 8 18절에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고난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데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이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슬픔을 통과하는 일까지도 영광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건강과 많은 세상적인 물질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늘 증명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증명이 됩니다. 요한일서 4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우리는 읽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대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을 방문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시편 138 3절을 읽도록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이 주께 단순히 기도하지 않았었고, 아주 절실한 필요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구하였기 때문에, 나는 다윗이 몇가지 특별한 필요를 가졌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첫 번째 일은 그의 영혼을 강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신체적인 필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에 힘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심장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이 예수님께 완전히 정착을 하기를 원하시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신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읽고 짧게 설명을 한 후에 그 환자가 내게 말했습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토마토가 익을 때, 겉 부분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향하여 익을까요, 아니면 안이 먼저 익고 겉 부분이 익을까요?” 나는 그 사람의 질문에 다소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대답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태양이 토마토의 겉에 쪼이기 때문에 아마도 겉 부분이 먼저 익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익는 과정이 중앙을 향하여 옮길 것이라고 추정을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틀렸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토마토는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익는다고 지적을 하였습니다. 태양이 토마토를 내리 쪼일 때,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향하여 익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실 때, 그분은 안에서부터 시작하고, 그때 바깥으로 옮기십니다. 당신의 손가락이 베었을 때의 치유는 표면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옮기지 않고 안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기를 시작하실 때, 그분은 늘 눈으로 볼 수 없는 안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볼 수 있는 물질적인 기준으로 측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어둡고 힘든 경험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움직이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과 고난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모든 일과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 하고 감사함에 따라서 그러한 위급한 신체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영적인 축복들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1990 6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