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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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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6. 07:09 횃불/1990년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2)

패트 화브리지오

아이들마다 다 다른가?

사람들은 종종 그러나 아이들은 각기 다르므로 달리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각기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우리 집 네 아이들도 여느 가정의 아이들처럼 성격과 기질이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 아담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마다 복종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에는 매가 필요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완화시킨 예는 없다.

이에 대한 두 가지 개인적인 실례를 들어보겠다. 우리 집의 막내둥이는 A급 기질을 소유했다. 그러 한 기질은 그 애가 말을 배우기 훨씬 전부터 나타났는데 그 애는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안돼라는 부모의 말을 직접적으로 불순종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방바닥에 드러누워 발을 구르며 앙앙 울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를 안고는 그만, 그만하며 내 무릎에 앉혀 울음을 그치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잠시 달래기는 했지만 훈련시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케 되었다.

그래서, 다음 번 그 애가 또 거절을 당해 드러누워 울며 보채자 나는 울고 있는 애의 다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그런 다음 의자에 앉아 그 애를 일어나게 해서 무릎에 앉히고, 울음을 그치게 하고, 그를 감싸고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로부터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보채는 일이 뜸해졌으며, 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회초리를 가지러 가는 사이 그는 얼른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니곤 했다. 물론 그 애는 내 뜻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위해 지금도 회초리를 맞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자기 고집을 꺾는 법을 배웠다.

이런 훈련이 그의 기()를 꺾겠는가? 아니다. 단지 자기 중심적인 그의 고집을 꺾어줄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이 요구된다. 내가 이 점에서 주님께 순종할 때, 그분은 우리 아이에게 자신을 훈련시키며, 자신의 뜻을 그를 아끼는 부모의 권위 아래 복종시키며, 아울러 자신의 인격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사실 훈련된 정신만이 자유로이 그 내면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는 바, 그것은 환경에 의해 쓰러지지 않는 법이다. 가지가 쳐진 포도나무만이 무성하게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막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집 큰 아이는 매우 예민하고 감정적이다. 그는 유아기부터 그러했다. 그는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황이 새로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우리가 시킬 때면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우리는 그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그를 바로잡는 일을 보류하곤 했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순종할 마음이 없을 때면 으레 눈물을 짜곤 했다. 그는 점점 정서 불안증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에게 자신의 감정에 굴복하도록 훈련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매를 사용하면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으며, 일의 결과를 당신께 맡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가정 예배 시간에 나는 그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반응은 눈물이었다. 우리는 위로하고 구슬러 보았으나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울어댔다. 그래서 그날 밤도 역시 그는 순종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침실로 가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자리에 앉은 채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 둘의 마음 속에는, 순종하지 않는 자는 바로 우리들이며, 우리의 아이를 위하여 우리는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즉시 방에 들어가 아이를 데리 나왔다.

그리고 그 애를 무릎에 앉히고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 아들이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주님께 우리가 순종하지 못했다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그를 때려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그를 때렸다. 그런 다음, 그를 어루만져주고, 방금 전에 아빠가 시킨 일을 하게 한 후 그를 침실로 돌려 보냈다. 우리는 그날 밤에 그 애가 아빠의 사랑 안에서 훨씬 더 편안하게 잠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 아이와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울음 소리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가 불순종할 시에는 언제든지 매를 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휠씬 더 안정해 졌고, 자기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의 기질은 예전 같고 조금도 변함없이 그는 민감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그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전에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의 감정으로 평가했다. 훌륭한 판단력을 갖춘 민감성은 좋은 것이다. 그는 자기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자기 자신에게는 보다 덜 집착하게 되었다. 나는 종종,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부족한 믿음과 아이의 눈물에 굴복해왔다면 그 아이가 얼마나 불안정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제 그의 예민함은 적극적인 창의력을 길러 주는 그의 장점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있다. 그날 밤은 우리 아들의 생애에 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주님을 향하여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마음의 그 한 영역을 막아 두었다가 열어 놓은 것과 같았다. 그 문을 열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심령은 자유로워졌다. 그의 기도는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정 예배 시간에 보다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 후로 나는 그가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 외에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나를 훈련시키신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 사이의 관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은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는 그들의 생애의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 자녀들의 주()이다. 이 사실은 필연적으로 나의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하시는 것처럼 나도 내 자녀들에게 그와 같은 충실한 언행일치의 행동을 할 책임을 나에게 부과한다. 내가 내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훈련시키신다. 그분의 훈련은 무엇이 진정자녀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매우 민감하도록 나를 가르친다. 훈련에 있어서 횡포가 설 자리는 없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나를 징계하실 때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한 행동이지 분노의 반응이나 배척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5:29). “저희(땅의 아버지)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12:10)

예증(例證)을 위해 내 아이가 방금 나에게(혹은 그의 형에게) 무례하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나의 자연스런 반응은 인간적으로 성이 나서, 꾸짖고 책망함으로써 그와 유사한 무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내가 매를 들고 참을성 있게 징계하고 그 아이를 무릎에 올려 놓고 그런 무례한 어투로 말하지 않도록 가르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아이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행동이다.

또 한 예로 내 아이가 자신에게 최선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을 몹시 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일 그의 요구를 수락한다면 그것은 그를 방종에 빠뜨리는 셈이다. 마땅히 나는 내 아이의 유익을 위하여, 그가 수용적인 자세로서 자신의 실망한 마음을 고쳐잡고, 그를 위한 부모의 사랑을 신뢰하고, 부모가 한 결정은 그에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이 그를 위한 최선의 것임을 믿는 것을 배울 것이다. 만일 아이가 자신의 의지를우리에게 복종시키도록 우리가 그를 성실하게 훈련시킨다면 확신하건대 그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어른으로 장성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애가 우리의 말을 경시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경시하게 될 것이다.

 

일관성 없는 체벌은 징벌이지 훈련이 아니다.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더 절망스런 일은 없다. 자녀를 화나게 하고 낙심시키는 것은 바로 부모로서의 우리의 일관성 없는 태도이다. 하루는 어떤 일에 대해 엄하게 안돼라고 말하다가도 그 다음 날엔 무관심과 분주함과 귀찮다는 생각에서 그들의 약간의불순종을 허용하거나 방관해 버린다. 매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훈련이 아닌 다른 것이 되버리고 만다. 그것은 아이들로 우리의 기분에 맞추도록 하는 폭력이 된다. 이 폭력은 그들의 권위에 대한 반발심을 강화시킨다. 그들은 자극을 받아 분노하고 실망하며 반항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우리는 부모로서 온전한 언행 일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단히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일에는 근면이 요구된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이외에 다른 어떤 동기의 힘으로도 그 일을 능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품행을 갖춘 자녀를 소유하고픈 욕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내게 권위를 행사하는데 있어 다른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을 수가 있다. 그런 경우, “이리 오라는 내 명령에 아이가 불순종한다면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훈련시키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가 한결 쉽다. 그러나 내가 의자에 앉아 아기를 보며 휴식을 즐기는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경우, “이리 오라는 내 명령에 아이가 불순종하면 훌륭한 품행을 갖춘 자녀를 소유하고픈 희망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자에 앉은 채 다소 엄하게 명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나는 아이에게, 처음 말한 것은 무의미했다고 말해 주는 결과가 된다. 그때 나는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주님, 당신은 나에게 자녀를 훈련시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이 의자에 계속 앉아있는다면 당신께 불순종하는 셈이 됩니다. 내가 아이를 순종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 당신께 순종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아기를 내려 놓고, 회초리를 들어 참을성 있게 그를 때린 다음 그를 무릎에 앉히고 위로해 주도록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13:24).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근면을 주실 수 있다. ()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 다음 호에 계속

 

(1990 9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