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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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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6. 07:12 횃불/1990년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에 관한 고찰 ⑤

몇 사람을 얻게 된 경위

윌리암 로저스

 

이미 말씀드린대로 르호보암의 통치 초기에 발생한 분열은 그 후로 다시 치유되지 않았지만 북부의 지파들 중 일부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사건은 적어도 두 번 있었습니다. 역대하 11:13~17에 기록돼있는 첫번째 이주자들을 제외시킨다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주하게 된 동기는 각 경우마다 약간 다른데 우리는 이것들을 성경의 문맥에 따라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맨 처음으로 이주해 온 레위인들과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많은 손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정과 재산을 떠나게 된 동기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여호와를 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주는 아사 왕의 통치 중에 있었는데 이것은 역대하 15:9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유다와 그 왕이 여호와를 구한 관계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번창하는 것을 보고 이끌렸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이주는 히스기야 때에 있었는데 이것은 역대하 30:11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비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이같이 겸비하게 된 연유는 히스기야가 초청의 편지를 지혜롭게 써서 그들에게 보내어 유다로 뿐만 아니라 여호와와 그분의 성소로 돌아오라고 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은 열 지파가 이 당시에 처해 있던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일 이년 후에 그들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삼킨바 되어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기(上記)한 세 경우의 이주는 그 동기와 방법에 있어서 선했기에 적어도 몇 가지 좋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함께 모으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는데 그 성격이 각각 달랐었지만 둘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시도는 분열이 일어난 직후에 있었는데 이 때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자기 수하에 두려고 유다와 베냐민 용사들을 모집했습니다(대하 11:1). 하지만 이 목적은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2-4). 또 다른 시도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화친하여 자기 아들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아합의 딸이었던 아달랴와 결혼하게 했을 때 있었는데(대하 18:1, 21:6, 이 시도가 있기 전까지는 르호보암과 아비야, 아사, 그리고 여호사밧의 재임기간 일부에 걸쳐 두 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적대감이 지속되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 젊은 부부가 재결합된 두 나라를 결국 통치하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왕상 14:30, 15:7,16, 대하 17:1). 그가 얼마나 큰 계산 착오를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은 역대하 19:2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의 행실을 정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이주를 잘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귀중한 교훈들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함께 모으는 것은 성서적인 목표 중의 하나로서 칭찬할만한 일이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옳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습니다.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옳은 방법이 물론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분명한 진리에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연혼(連婚)하는것도 역시 옳지 않습니다(대하 18:1). 여호사밧과 그의 후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연합은 결국 비싼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행하기를 애쓰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많은 열매를 분명히 맺고 있다면 아사 시대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틀림없이 우리에게로 이끌림을 받을 것입니다( 18:26). 설혹 지금까지의 실패와 쇠퇴로 인해 그처럼 복된 현상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서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쩜이냐?”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겸손히 하여 히스기야 때처럼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여전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귀중히 여겼던 진리들을 경시 한다면 부흥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될 것입니다.

이상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하는 시편 133편 말씀이 그 속에 담긴 아름다운 두 비유와 더불어 떠오릅니다. 물론 시편 기자가 그 시편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연합이었었으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가 이 연합을 그려볼 때 오직 시온, 곧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었으며 또한 시편기자 자신이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였던( 132:5)이었던 시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그려보았다는 점입니다. 히스기야가 이러한 관념을 얼마나 확고히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비방한 다음과 같은 말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히스기야가····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다만 한 단 앞에서 경배하고 그 위에 분향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대하 32:12). - 다음 호에 계속-

 

(1990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