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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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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2. 16:30 말씀 안으로/에베소서

A. McShane

모든 신자들은 율법이 의롭게도 거룩하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율법에서 자유로움은 오 행복의 조건”이라고 진실하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그들이 불법적으로 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행동 기준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낮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모든 세부사항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들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돌판에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되었으며, 그것들의 보존을 위해 법궤가 특별히 만들어졌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율법이 더 이상 자신들에 대해 이해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의 실천적인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가 성도들의 행실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행위로 올라갈 것을 기대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요구 사항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걸으라”(엡 5:2)는 권면은 이것이 그분 자신 안에서 발견하려는 하나님의 요구하는 표준임을 암시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이 그분에게 감미로운 향기였던 것처럼 그래서 그분의 사람들의 사랑의 행보는 마찬가지로 그분에게 감미로운 향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첫째 계명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라 불리우시는 오직 한 분이셨던 분이 요구하십니다. 이 사상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6)는 바울의 말씀과 병행합니다. 그분은 지고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인도되어 벗어났던 애굽은 우상 숭배의 큰 중심이었고 에베소 또한 우상 숭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유일한 주 하나님의 중요성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한 분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분을 아버지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을 능가합니다.

 

둘째 계명은 우상 숭배입니다. 에베소는 우상 숭배의 큰 중심지였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파할 때 “위대하시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다이아나여”(행 19:28)라고 군중들이 외쳤을 때 일어났던 소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들은 “우상들은 한 때 당신을 이겼고 당신을 저주했다”라고 노래 부를 수 있었지만 “우상 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무 상속 유업도 받지 못하느니라”(엡 5:5)라고 그들은 가르침 받았습니다. 계명에서 주로 사람이 만든 물건이 정죄되었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기 원하는 물건을 그 우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특징짓는 모든 악들 중에는 아무것도 우상숭배만큼 그렇게 지속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은혜의 시대에 고백하는 교회에서 일찍이 나타났습니다.

 

셋째 계명은 주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에베소서에는 그에 상응하는 표현은 없지만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엡 4:29), 심지어 “어리석은 이야기나 희롱하는 말도 적합하지 아니하니”와 같은 말의 남용에 관한 교훈도 있습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것인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쉬는 날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킨 날입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세월을 되찾으라(아끼라)”(엡 5:16)는 표현은 하나님을 위해 보낸 시간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기 위한 모든 성도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시간은 귀중하지만 종종 시간이 너무 많은 것처럼 낭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즐거움을 위한 공간, 사업을 위한 공간”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아마도 그분께 드려지는 봉사보다 그분과 함께 보낸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 존중에 관한 다섯째 계명은 에베소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유일한 계명입니다. 6:1-3에서 바울은 그것이 약속이 있는 한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며, 부모가 그들 스스로 부양할 수 있으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회적 도움으로 연로한 부모들의 절박한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부모에 대한 “존중”은 모든 면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노년의 사람들은 곧잘 외로움을 느끼며 그들에게 지출되는 돈보다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섯째 계명인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성도들이 쉽게 순종할 수 있는 계명이지만 종종 살인의 원인이 되는 분노가 해가 진 후에도 남겨지도록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 표준을 그들에게 세우고 있습니다(엡 4:26). 형제들의 분노가 실제로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때때로 영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비교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갈 5:15). 혀는 칼만큼 잔인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간음에 관한 정죄와 부합하며, 종종 익명을 요구할 만큼 야비한 것이며, 그렇게 심각한 악들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엡 5:3-4). 이방인 세계에서 간음은 너무 일반적이었으며 그것이 심각한 범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때 존경할 만했던 곳을 포함하여 오늘날 세상의 많은 곳에서 그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도둑질을 한 자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엡 4:28)라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또 성도들의 기준이 율법보다 더 높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긍정적인 명령이 더해졌습니다. 성도들이 훔치고 있는 것이 주인에 의해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아홉째 계명 “너희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또는 “진실하게 되라”말로 대응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진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코 예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의 문제에 그들이 관여했을 때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증거 때에 거짓말의 심각성을 목격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니야와 삽비라(행 5)가 거짓 행동으로 초기 무덤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계명은 특별히 사법적 문제에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거짓말은 다른 문제들에도 여전히 심각합니다.

 

열째 계명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성도들 사이에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엡 5:3)고 하는 다른 악입니다. 그것은 타락의 원인이었으며 하와가 열매를 먹도록 이끈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에 대한 실제적인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많은 악들의 근원이며, 어떠한 방식으로도 작은 중요성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마음에서나 성장할 수 있는 잡초이고, 발견되는 즉시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이 서신과 율법의 연결에서 배울 수 있는 단순하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교훈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시므로 은혜가 율법에 정한 기준을 낮추지 않지만, 신자로 하여금 그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하며 심지어 더 높은 수준에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유 4)는 자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자는 참된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교제에 슬그머니 들어갔지만,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종종 성령에 관한 언급은 우리가 신성한 기준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도우심에 의한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