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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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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6. 11:39 횃불/1991년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부부상

H. P. 바커

만일 한 젊은 남편과 아내가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따라야 할 본이 되는 기록을 성경 말씀 가운데서 찾고자 한다면, 어떤 부부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제기함에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일이 그들의 온 삶 가운데서 가장 최고의 관심을 두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 일은 단지 주님께 많은 감사를 돌리는 사람들에게 만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가운데 어떤 부부를 그 젊은 부부의 모델로 두라고 권고할 수 있을까요?

아담과 이브?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브는 자기 남편을 하나님께 불순종 하도록 하여 몹시 비참한 종류의 결과에 얽매이게 하는 데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강한 믿음에 동참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웃어 넘겼으며, 아브라함은 사라로 인하여 완전한 진실의 길을 걷지 못했던 경우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육신적인 동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리브가는 자기의 남편을 훼방하기 위하여 큰 사기를 쳤습니다.

모세와 십보라? 아닙니다. 십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자기의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가져올 때에 자기 힘을 다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봉사와 간증의 연합된 길에 있는 모범이 되는 한 남편과 아내를 우리가 찾으려고 한다면, 신약 가운데서 잘 읽지 않는 부분인 로마서 16장을 펼쳐야만 합니다. 3절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여섯번 언급됩니다. 세번의 경우에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브리스길라가 결코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 연약한 그릇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둘이서 걷는 믿음의 길에 헌신하여 간증과 수고와 고난에서 자기의 부분에 기여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종에게 잘 어울리는 아내가 아니었고, 이제 알게 되듯이,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이 훌륭한 부부의 이름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굴라는 독수리를 뜻하는데 남자의 특징이어야 하는 활력과 대담성과 용기를 의미합니다. 브리스길라는 구식을 뜻하는데, 그리스도인 아내가 어떻게 옛날의 방법을 잘 유지함으로써 주님을 섬기는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들은 물론 세상으로부터는 비웃음을 사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매우 값어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일이나 부모들이 주님을 경외함으로 아이들에게 순종과 진실함을 가르치는 일과 매일의 기도와 성경읽기를 가르치는 것과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다른 많은 일을 하는 것은 구식입니다. 이러한 관습을 유지하는 일은 신식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지 모르지만,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예레미야 6 16)는 권면을 우리는 잘 기억할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8 2~3절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의 황량한 언덕 너머인 극동지역의 본도 출신인 그들은 가이사의 도시에 거주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린도에 막 이사를 왔습니다.

그들은 검소한 환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추방당한 친구들의 거주지에 바울이 왔습니다. 그들은 그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까?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바울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적대적인 유대인과 한 지붕 밑에 거주하러 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필시 기독교의 진리에 완전히 서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알려주었던 기이한 일들에서 그들은 바울을 자기 가정에 영접한 풍성한 보답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조용히 일하면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을까요! 바울과 아굴라는 모포와 가죽의 길이를 함께 꿰매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대화를 하였을 것입니다. 필시 브리스길라는 집안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가끔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남편과 아내는 자기들의 하숙인의 말씀에 감사하면서, 주님되신 구세주의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자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반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두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사도도 우리의 집에 거하기 위해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만 사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말씀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바울보다 더욱 위대한 방문객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423).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는 반드시 참된 모든 봉사와 간증이 늘 솟아나오는 내부의 샘이 되어야만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사도행전 18 18절에 나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동안에 18개월이라는 기간보다 더 연장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수는 굉장히 불어났고, 우리의 두 친구들의 일시적인 집이 있었던 호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에 커다란 모임이 모여졌습니다.

이러한 기간 동안에 아굴라와 그의 아내는 필시 많이 배웠을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자기네들에게 몹시 중요했던 말씀을 가르쳐 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종에게 굉장히 밀착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항해에 동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사도행전 18 18) .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그것은 아마도 바울과의 동행을 계속하려는 마음이거나 저 건너편에 있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쓰임을 받도록 하는 범위를 찾고자 하는 바램에서 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이스에 있었던 자기네들의 집을 떠난 것은 세상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장막을 만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매우 다른 장막을 만들었던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지금 장막을 만드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중요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의 관심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하였고 우리가 보게 되듯이 사랑하는 이름을 위하여 그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고난과 자신의 잃어버려짐에 기꺼이 내맡겼습니다.

에베소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서능변 있는 아볼로를 가르치는데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개인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과 같이 이제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데에 통로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특권일까요! 그들의 개인적인 가르침은 아볼로가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로마서 163, 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그들을 평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상황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았던 일은 그 이야기를 알았던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헌신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기록은 우리들을 위해 보존이 되어서 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를 위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다섯번째 언급은 고린도전서 16 19절에 나오는데, 그들이 많은 추억거리를 갖고 있었던 고린도에 있는 모임에 문안을 보낼 때입니다. 이때쯤 그들은 아직 에베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가 위치해 있었던 소아시아의 해안가에 위치한(19) 모임들로부터 인사를 보내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로 그들은 사도를 자기들의 가정에 영접하였고, 이번에는 교회로 모이는 모임을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인지요!

사랑하는 사도가 머지않아 사형대에서 처형받기 위하여 차갑고, 습기찬 굴속에서 나가려 할 때에, 그처럼 신실하게 경주를 했던 자기의 여정을 돌아다보면서 그는 이 경건한 부부를 생각했고, 지상에서 그의 마지막 행동의 하나로 디모데를 통하여 그들에게 문안을 보냈습니다(딤후 4:19).

 

(1991 5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