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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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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6. 11:36 횃불/1991년

바울은 무엇을 전하였던가?(2)

 

우리는 지난 호에서 바울이 증거하였던 말씀 중 소경된 인생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과 죄용서함 받는 부분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창조주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경된 인생들의 눈을 여시사 그들을 어두움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구원하심은 구원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그 자체는 더 좋은 목적의 방법이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더 좋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희에게 보내어 눈을 뜨게하여····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7~18).

이제 본문에 있는 거룩케 된 무리가운데서 기업을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 이것은 바울이 평생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신앙의 모체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단원을 두 부분으로 떼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거룩케 된 무리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거룩케 되지 아니한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이나 땅에서 아무런 기업도 약속도 없습니다. 바울시대에나 오늘에나 지상에는 거룩케 된 무리, 즉 거룩한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이나 상태나 동일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서두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린도전서 1:2)

이 말씀에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뜻이 나와 있습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 모여 있는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본래 구별된 무리, 성별된 무리, 불러낸 무리등의 뜻으로 풀이됩니다. , 패역한 세상과 잘못된 신앙을 가진 종파들에서 따로 불러내어서 거룩하게 구별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죄 용서함 받은 사실이 무엇보다도 필수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죄인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비방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모두가 죄인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의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교만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신앙이며, 그릇된 깨달음인지요?

인간이 죄악의 수렁에서 벗어나 의인의 신분을 얻으며 의인으로 대접받고 의인된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요 이 세상 어느 종교에서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특권인 것입니다. 실감이 나지 아니하거든 다른 종교인들이 죄와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고생하며 고행하는 모습들을 살펴보십시오. 이그러진 표정에 가장 심각한 얼굴로 자아의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 고통하는 종교인들의 고뇌에 찬 모습을 보십시오. 종교는 죄로부터 벗어난 평강과 기쁨을 인생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죄에서 온전히 구원하여 줄 뿐 아니라 죄에서 벗어난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날에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축복을 주십니다.

물론 성경 로마서 3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하고 말씀하심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도덕적 차원에서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의롭다하신 자도 죄인이라는 뜻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자 된 것은 첫째로, 신분입니다.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속에서 살며 고생하다가 죄 속에서 죽어서 죄와 함께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에 매인 불쌍한 죄인이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구속의 능력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받은 사실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며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으셨는데 어찌 우리가 죄에서 완전 해방되며 의인의 칭호를 받는데 부족함이 있을까요? 충분합니다.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당신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당신을 완전한 의인의 신분으로 만드는데 충분합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비텐버그 수도원 고탑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 피나는 고행을 쌓다가 로마서 1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신 말씀을 통해서 의인의 칭호를 단번에 받고 껑충껑충 뛰며 즐거워한 모습을 여러분이 상상하여 보시기바랍니다. 죄에서의 해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루터는 그 후 놀라운 복음을 가지고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가 복음의 위 력이····.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인격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전 날에 우리는 죄 속에 살아도 죄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죄를 짓되 스스럼 없이 죄를 짓던 죄인이 아닙니까?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이러한 과거를 진실로 부끄럽게 여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격의 변화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이의 능력이 질그릇 같은 인간의 영육 속에 거하므로 인간의 신분과 성품을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돼지와 양의 모습으로 비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돼지는 더러움을 좋아하므로 더러운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돼지는 깨끗한 환경도 즉시 더럽게 만드는데 반해서 양은 깨끗한 것을 먹을 뿐 아니라 깨끗한데 처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성품으로 변화된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은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구원의 확신도 없이 자신의 열심만 믿고 자만에 빠져 있는 종교인들이 아무리 많이 모였다 할지라도 교회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으로 변화된 적이 없는 교인 수만명이 모여서 예배드리며 찬양한다 하여도 주님은 그곳에 가시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참으로 구원받고 거룩함을 입은 신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며 전파하며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거룩한 무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기업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 거룩케 된 무리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주님의 기업을 누리며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기업은 천국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찬란한 영광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신랑의 신부로서 이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혼인집에 신부는 주인공입니다. 축하객이 몇 명 빠져도 결혼식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빠지면 결혼식은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천상에서는 혼인준비를 갖추어 놓고 신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가 나타나지 않으니 결혼식은 지연될 뿐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시록 19:7).

그렇습니다. 교회는 신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기업의 찬란한 영광을 깨닫고 옥중에서 갇혀 있으면서도 에베소서 1장에서 찬란한 주님의 영광과 기업의 풍성함을 기뻐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바울은 성도들이 이 기업에 눈뜨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 풍성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득권을 얻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풍성한 기업의 시작인 셈입니다. 성도가 여기에 눈을 떠야 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어떠한 것임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에베소서 1:18~19).

오 형제여 !

창조주 하나님이 정성들여 준비하신, 그대를 위하여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을 아십니까? 그 풍성함을 아십니까? 교회는 역사의 꽃이며 열매입니다. 교회 전의 모든 시대는 교회를 위하여 있으며 교회 후(휴거 후)의 모든 사건도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주 역사의 주인공이며 궁극적 목적이 되시는 이 교회에게 주신 영광의 풍성함을 그대는 아십니까? 만약 그대가 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대는 복 받은 자입니다. 이제 이 세상 모든 역사의 막을 내리고 영원의 세계의 서두에 우주 역사에서 가장 기다리고 사모했던 결혼식이 있을 것인데 신랑은 어린양 예수님이며 신부는 교회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제 결혼식 후 신랑 신부가 신혼살림을 시작하듯 이 교회도 주님과 함께 찬란한 영광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전 영원의 세계에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짝을 구하다가 드디어 진실한 사랑의 짝을 찾았으니 신부 곧 교회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모든 천군천사와 하늘에 참여한 자들의 축복과 부러움 속에 치러질 혼인예식을 기다리십시오!

오직 우리의 모든 소망은 이것이니 사도바울도, 먼저 간 성도들도 다 이 소망에 부풀어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항상 기뻐했고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자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이 혼인예식을 준비하고 하늘의 풍성한 기업을 누릴 주인공으로서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안식처도 아닙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기복신앙(땅의 복을 기원하는 신앙)은 거짓에서 나온 것입니다. 작금의 기독교를 썩게 하는 기복신앙은 사탄의 거짓술수일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체된 구원받은 성도들까지도 실생활에서 기복신앙의 영향을 받고 살고 있는 모습에 우리는 통곡을 금할 길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인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 20).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썩고 부패한 죄인을 구원하려 하심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부패한 죄인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세상까지 찾아오면서 못당할 고난을 당하시고 처참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이 아니했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부활 후 다시 하늘에 오르심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소망을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고 살라고 본을 보이심입니다. 진실로 이 소망 없는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며 살다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주님 나라에 갈 때에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업은 망합니다. 세상나라도 망합니다. 세상도 망하고 불사른바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은 결단코 망하지 아니합니다. 쇠하지도 썩지도 아니하는 이 기업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합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 3~4).

이제 잠시 후에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인데 그 기쁨이 어떻하겠습니 까?

우리의 믿음에 부끄럼이 없습니까? 혼인 예식에 참여하기에 부끄럼이 없습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살피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남은 시대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요한계시록 19:7~8).

 

(1991 5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