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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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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 16:54 횃불/1991년

부리는 영(천사)-(5)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2)

서늘한 가을 밤-스웨터를 입어야 할 만큼 쌀쌀하면서도 10월이면 만연해 있는 인디언 여름철(미국 북부의 늦 가을의, 봄날 같은 화창한 날씨-역주)에 빗댈 만큼 따뜻한-이었습니다. 신문팔이 삼총사의 집으로 그 마을에서 잘 알려진 커다란 3층 건물이 음악과 노래 소리로 시끌시끌했습니다. 현관 문 틈 사이로 힐끗 쳐다만 봐도 거실과 주방을 가득 채우고, 복도로 밀려나와 심지어 계단 위까지 올라 앉아 있는 5,60명의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피아노 반주와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큰 소리로 떠들썩하고 빠르게, 어떤 젊은이들은 화음을 넣어 부드럽고 조용하게 불렀습니다.

이것이 시냇가의 집’(the Brooks residence)의 일요일 밤의 정경이었습니다. 나의 가정의 분위기는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날은 으레 방문객을 위 한자리가 베풀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서 방황하거나 마음이 상한 어떤 젊은이들에게도 기꺼이 어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선교사들과 설교자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성도들은 열린 문과 정성을 들인 음식과 부드러운 분위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네 자녀(아들 넷과 딸 하나), 가끔씩 참석하시는 할머니 등 가족 중심으로 유쾌하게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세든 사람들과 하숙생들과 늘상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더해졌습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가정을 남겨둔 채 낯선 나라로 와 나 혼자만의 방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한 적응력을 요구했습니다. 진정 처음으로 나는 내 가족과 어린 시절의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시간을 내어 이러한 느낌을 글로 적어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데 매우 둔감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얼마나 종종 생활 속의 축복이 그 참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나쳐져야만 하는지요! 그렇게 지나쳐진 후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 깨달음이 보다 늦게 나에게 왔습니다. 나는 아름답고 경건한 가정적인 유산을 물려받는 축복을 누린 사람인데 반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미 받은 축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의무가 내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 동안의 나의 독신 생활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를 가슴 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 생활 속에는 결혼이나 가족 관계 속에 흔한 일상적인 의무나 관심사가 일절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자기중심 생활을 벗어나는 동안 나는 힘들게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내 자신에게 넘치는 축복을 가져다 주는 사실을 보고 놀랐습니다.

특별히 한 여학생을, 신앙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도움을 주는 교우관계로 그녀를 이끌기 위한 특별 기도 끝에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점차 나의 적은 사랑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토록 단순한 복음의 진리와 더불어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결과 그녀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인생의 꽃과 같은 한 청춘 여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68:6).

이 말씀은 내 경험 속에 얼마나 생생히 실현되었는지요!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녀와 조카들이 있었습니다. 음식이 나눠지고, 문제가 의논되고, 기쁨이 표현되는 이 모든 일들이 다 가족현상의 부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들과 언니들은 부산하게 나의 병간호를 했습니다. 아버지들과 오빠들은 내 차의 상태에 대해서 조언과 더불어 점검을 해 주었습니다. 조카들은 이 베티 아줌마 곁에 꼭 달라붙어 같이 놀자고 졸라댔습니다. 아들과 딸들은 직장 문제와 진학문제, 그리고 장래 배우자 문제 등에 관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족 관계 속에서는 인종의 장벽조차 극복되었습니다. 물론이 경우 갑절의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말입니다. 공동체 속에서의 영적인 생활은 문화적인 장벽이 가로막는 경우에도 일정한 영적인 수준하에 사귐을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영적인 사귐이 증가함에 따라 자연 다른 지역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설계자로서 가족 개념을 기초(起草)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허용이 가족 속에서 얻어지는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를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비록 가족이 만족스런 인간 관계를 위한 준비 장소로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실패한 모습들이 부적응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가득차 있는 사실로써 입증됩니다.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재창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다시 한번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5:22~32), 그리고 교회 안의 구성원들의 관계를 형제와 자매 및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로(딤전 5:1,2)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만족스런 인간관계의 저장소인 그리스도인 가정으로 가정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물론 자연상태의 육신적인 가족이면서 또한 영적 인 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내 경우를 살펴보면 나는 내 가정에서 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으며, 가정을 떠난 지금은 주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영육간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후자의 단계에서는 내가 믿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가정을 개방하고 인간 관계를 넓히고자 하는 소망은 전혀 새로운 봉사의 길로 나를 인도해주었습니다. 나는 항상 여유라는 것을 결혼한 부부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왔었습니다. 독신 여성들은 늘상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사 먹고 아파트 내에서는 즉석 요리로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잠비아에는 레스토랑이 거의 없고, 일반적으로 가공식품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온종일 밖에서 일하는 관계로 가사 시간이 제한받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방을 만들고 요리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2인용 침대를 갖춘 내방은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유용했으며, 덕분에 끊이지 않고 방문객이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밀림 속에 있는 그들의 선교 본부로 가거나 혹은 그곳에서 오는 길에 이 도시를 통과하는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어떤이들은 사업 허가증이나 수입 허가증과 같은 유용한 자격증을 소지했습니다. 그런 반면 어떤 이들은 도시 병원에서만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질병이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휴식이나 이야기할 사람이나 또는 위로해줄 사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들과의 짤막한 사귐을 나누는 동안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선교 본부 생활에 대한 식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의 생활은 인간 관계를 적지 않게 경직시킨다는 것이 나의 관찰 결과였습니다. 일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가며, 대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울러 같은 임무를 띤 다른 신자들의 무리와 영적인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적어도 유럽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과중한 역할입니다. 나는 이러한 임무로 허덕이는 사람들의 손을 강하게 하는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내 스스로는 결코 선택하지 않았으나, 나의 가족과 나의 연단과 나의 물질적인 소유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준비시켰던 사역을 나에게 허락하셨던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나눈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종종 나눔을 통해서 내 짐이 가벼워지는 기쁨을 맞보곤 했습니다. 주는 일 속에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보상이 있었습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일의 뚜렷한 보상으로 문제해결을 받곤 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도움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언이 필요치 않은 줄로 압니다. 한편 내게 있어서 베풂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물질에까지 미쳤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서든(그들은 매우 관용적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통해서든 나의 물질적인 조건은 호전되면 되었지 감퇴되지는 않았습니다. 실로 주님은 결코 사람에게 빚을 지시지 않습니다!

아울러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서신을 보내오고 위해서 기도를 해준 카나다에 있는 친구들과 친지들이 베푼 도움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다 표현할 수 있을는지요! 분명 그들의 사역은 천사의 사역이었습니다. 서신이란 필연적으로 관심을 의미하며 우리 모두는 남들이 기억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서신을 통한 가정과의 짤막한 만남으로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의 어려움을 알려 주는 서신은 우리를, 긍정적인 면들은 확대시키고 부정적인 면들은 축소시키는, 지난 생활에 대한 비현실적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만일 주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분에게 서신을 띄우고 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0세 된 애기라는 할머니께서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사실은 종종 나를 낙심과 좌절 가운데서 끌어올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꾸준한 기도는 결실을 보게 마련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위한 나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셨습니다. 그분은 그러한 필요만을 충족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 나아가 그분의 머리되심 아래서제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몸으로 활동하여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분의 가족을 구성하는 새로운 사역으로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1 4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