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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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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6. 12:29 횃불/1991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

-시드니 멕스웰-

 .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본 논고(論考)의 주제는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던진 질문을 우리 마음에 상기시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24:18). 주 예수님은 진실로 피로이케오, 즉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the Sojourner)이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17:14,16)고 분명히 선포하셨듯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 오시기 이전의 그분의 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그분께서 세상이 지음을 입기 전에 하늘 성소의 보석 위를 거니셨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빛이 있으라”( 1:3)는 음성도 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 속에 낯선 손님으로 들어오신 그분의 입술로부터입니다. 이에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의 영광스런 주님으로 채우고 성경으로부터 그분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1:1). 먼저 구약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이사야 6:1~4)

문둥이였던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구하던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이 그를 번성케 하셨습니다(대하 26:5). 또한 그는 기이한 도움을 얻어 강성해졌습니다(15), 그러나 어느덧 그의 마음이 높아져 그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16). 우리가 높이 들린주님께로 인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인 중대 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스랍들이 그분의 거룩함을 소리높여 외치며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정결케 될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으로 돌아가보면 저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를 위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2:41).

 

목자되신 왕(미가서 5:2~4)

미가서 4:1~8은 우리에게 장차올 왕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줍니다. 시온산이 백성들이 모일 장소로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원리들이 이 놀라운 중심지로부터 흘러나갈 것이며(2), 평화가 그분의 왕국에 차고 넘칠 것입니다(3). 그분의 백성들의 번영이 4~5절에 묘사돼 있으며, 이어서 구원을 가져올 인물에 대한 묘사(5:2~4)가 차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3절은 왕의 거절과 재림을 가리키는 삽입구이며 4절은 그 영광스런 시대에 행해질 주권자(the Sovereign) 의 사역에 대한 묘사로 다시 돌아가는 구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선재하심은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2)는 표현속에 확고히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6로 돌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분의 출생 기사를 통해 미가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봄으로써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한 추호의 의문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이상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선재하심에 대한 언급을 약()하고 이 근본적인 진리에 관한 요한복음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영원과 관련시키는 칭호들을 지니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뵙게 될 것입니다.

 

말씀(the Logos)(요한복음 1:1~2)

태초에”(1)라는 표현은 우리를 창세를 초월한, 그 이전의 때로 이끕니다-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무한히 영원한 과거를 가리키는데 이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있으므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전치사 함께”(프로스)가 사용된 것은 이 말씀이 별개의 개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채 존재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또한 그것은 구별된 개체성과 영원한 연합관계를 나타내 줍니다(2). 우리는 14절에서 그분이 무엇이 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전편을 통해 그분은 이 인성(人性) 안에서 자신의 선재하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분이 창조 안에서 증거하시는 것은 이 말씀(the Word)으로서입니다. 그분은 창조 이전에 계셨고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존재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15,30에서 선구자 세례요한의 중요한 진술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자기 뒤에, 그러나 영원으로부터 오신 그 시점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30).

 

인자(人子)(요한복음 6:62)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의 강화(講話)는 그분의 선재하심에 대한 증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나가 예표하는 그 대상이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십니다(51). 그분은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62)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라는 칭호는 그분의 인간적인 기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과 그분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자의 이전 있던 곳이란 어구는 베들레헴 강림 이전에 있었던 하나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

요한복음의 여러 장에서 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중대한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대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선재하심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가리켜 자신에 대해 증거한 자라고 지적하고, 따라서 그분의 증거는 진실이 아니라고 고소했습니다( 8:13). 이에 주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고 답변하셨습니다(14). 그분은 하늘에서 아버지와의 사귐을 즐기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심지어 십자가로 나아가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러한 사귐을 즐기셨습니다(16). 42절에서 주님은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선재하심을 일절 의심치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전지하심을 엿보게 됩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여기서 말하는 은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 아닌 선천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생애 어느 시점에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일절 거부합니다. 히브리서 10:7은 그분께서 이러한 지식을 항상 지니고 계셨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갈보리가 가까왔다는 것은 엄숙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1).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돌아갈 것을 아셨으며, 자신의 제자들과 작별을 하면서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6:5). 요한복음 16 28에서 그분은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는 매우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보자(요한복음 17)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분의 거룩한 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고요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은 그분의 본향이 아님을 새삼 기억케 됩니다. 그분은 창세 전에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의 아버지께 간구를 올리셨습니다(15). 지금 그분은 그 영광을 새로운 상황, 즉 영화롭게 된 인자(Man) 안에서 취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자기 사람들에게 주셨으며 그들은 그분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과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은 것을 믿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그 사역을 이뤘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4). 그리고 자신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 차례 더 반복하신(14,16) 다음, 다시 한번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

요한복음 18:37에서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자 그분은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라고 답변하였는데 이 답변은 사 복음서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된 오심보내심이 그분의 출생으로 말미암은 보냄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보냄을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좌에 앉으신 분( 6)과 목자된 왕( 5)으로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말씀(1)과 인자(6)와 보냄을 받은 자(8,13,16)좌 중보자(17)와 그리고 왕(18)이십니다. 이 모든 내용을 통해서 성경의 기록은 우리를 만족케 합니다. 모름지기 그분은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하늘 보좌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랑으로 인해 땅에 내려오사

눈물을 흘리시고

피를 쏟으시고

죽음으로 나아가셨네.

어찌 다 형언하리요

우리 영혼을 사망과 지옥 권세에서

건져내고자 당하신 그분의 고난을.

-다음 호에 계속-

 

(1991 6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