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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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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0. 11:36 횃불/1992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윌리암 맥도날드:

9장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1)

 

불가능한 작업

성경의 영감성(靈感性)을 입증하는 가장 중대한 증거들 중의 하나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성경은 어떤 인간도 결코 쓸 수 없는 전기(傳記)입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완전한 사람의 생애를 창작하기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영웅의 성격에서도 어딘가에 흠이 드러날 것이며, 완전한 기준 이하의 언행심사가 발견될 것입니다. “악한 인간은 완전한 인물과 완전한 생애, 완전한 책을 창작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인간은 그것들을 날조해내지 않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그분의 생애만큼 놀라우며, 이 둘 다 하나님에 관하여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인간의 고안물에 불과하다면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역사(歷史) 가운데서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무력이나 뇌물을 쓴 일도 없이, 무기나 금전을 사용한 일도 없이 그분이 세상에 그처럼 깊은 자국을 남기신 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그분은 누구셨으며, 어떠한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셨을까요? 유사(有史) 이래로 그분과 같은 인물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것은 어찌된 셈입니까? 그들은 이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계시 종교의 중대한 원칙,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복음이 철저히 사실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 하지 못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 위에서 사신다면 어떤 모습을 지니실까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목격담을 제공하고 그분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자 동시에 철저한 인간이시기도 했던 그분의 비할 바 없이 완전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야기를 날조해낸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단순히 묘사했습니다(요일 1:1). 그들이 묘사한 인물이나 그들의 기록에 동기를 부여하신 분은 다 주님 자신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존재만이, 완전한 존재가 어떠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으며,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심히 타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한 사람은 불신자였던 미국인 떼오도르 파아커(Theodore Parker)였습니다. “세상으로 늘어뜨린 예수님의 그림자로 그분을 헤아려 보십시오. 아니, 세상을 비춘 그분의 빛으로 그분을 헤아려보십시오. 그러한 분이 세상에서 산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 모든 이야기가 허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플라톤이나 뉴톤이 전혀 실존하지 않았었다고 가정합시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사상이나 그들의 작품은 누가 만들어냈을까요? 뉴톤의 작품은 뉴톤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예수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조차 지적한 것처럼 4복음서의 기자들이 서로 작당하여 그처럼 숭고한 인물을 날조해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날조해내려면 하나의 기적 아닌 네 개의 기적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앤더스 경(Sir Robert Anderson)이 말한 것처럼 만일 복음서의 영감성을 부인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그 기자들의 재능을 훨씬 더 크게 부각시켜 줍니다. “그리고 공공연한 불신자이자 탕자였던 루소(Rousseau)조차 다음과 같은 평결(評決)을 내렸습니다. “한 사람이 그와 같은 역사(歷史)에 관한 주제를 제공하는 일보다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역사를 합작해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그 유대인저자들은 어법(語法)에 유능하지 못했으며, 복음서에 포함된 도덕성에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 진리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어찌나 놀라운지 만일 그것을 날조해 냈다면 그 날조자는 영웅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일 것이다.”

 

완전한 인격

신약성경에 기록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에 관한 것은 모두 절대적인 완전 그대로입니다. 그분의 인격에는 흠 하나조차 없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존재하지 않았기에(요일 3:5)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고후 5:21). 그러기에 그분은 가장 거룩한 자기 제자조차 감히 하지 못하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8:46).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든지 혹은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라는 말을 그분이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따위의 무지의 인정(認定)은 그분의 신성(神性)이 거짓임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분은 변명을 한다든지, 사과를 한다든지, “미안하다라는 말을 결코 하신 적이 없습니다. J. G. 벨넷(Bellett)이 말한대로 자신의 말을 다시 살펴본다든지, 자신의 발걸음을 다시 추적해 보는일은 그분에게 전혀 없었습니다. 고귀한 성품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사랑이든, 친절이든, 겸손, 인내, 온유. 정직, 절제이든, 다른 어떤 미덕이든 그분 안에서 다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 모든 미덕들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또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친절보다 정직이 더 두드러지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겸손보다 인내가 더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구주에게서는 이 모든 특성들이 각각 충만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모든 미덕들이 온전히 섞여 있어서 조화있게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은 은혜와 진리를 온전히 표현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이것은 은혜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이것은 진리입니다( 8:11).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그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가운데서 어떤 미덕들을 우리는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우리에게는 그 미덕들이 평범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이상(理想)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용기와 진실과 경건한 열심은 당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분의 성품 중 적어도 세 가지 특성만은 그들의 평가에 생소했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심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흘러 넘치는 범세계적 사랑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간의 애정이나 사회적, 부족적 교제 따위는 범세계적이지만 우리 인종이나 우리 가족이 아닌 사람들, 심지어는 우리의 실제적 잠재적 원수들까지 포함하여 사랑하는 그 사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 가운데서 그 시대가 식별하지 못했던 또 다른 특징은 용서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감정은, 로마에 있는 술라(Sulla) 기념비 위에 다음과 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친구가 나에게 유익을 주었든지, 혹은 어떤 원수가 나에게 해를 끼쳤든지, 하여간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이자까지 지불했노라.’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인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그분은 겸손의 미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은 무지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셨으며, 그들의 선생님과 주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으로 더러워진 그 발을 씻어 주셨고, 밤새껏 아무 고기도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반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2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