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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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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0. 11:35 횃불/1992년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2)

- 사랑의 영속성과 은사의 일시성 -

은사는 부분적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을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패하리라”(고전 13:9,10).

방언은 바울이 이 서신서를 기록한 후 얼마 안되어 중지되었지만 예언과 지식의 은사는 온전한 것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은사 역시 방언이나 다른 모든 은사처럼 일시적인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방언보다는 덜 일시적입니다. 방언 은사의 독특한 목적은, 이 은사가 예언 및 지식과는 달리 사도시대 이전이나 이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강론이 관계되는 한 바울은 방언이 이미 중지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그 은사는 8절 이후에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전 13장에서는 그렇다는 뜻임 -역주).

9-10절에서 바울이 첫째로 강조하는 바는 지식과 예언의 부분성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이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해질 모든 은사의 대표격입니다. 그 까닭은 그 때 가서 어떤 은사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온전하지만 그 은사를 수여받는 사람들은 제한적입니다. 바울은 그 우리속에 자신도 포함시켰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조차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더욱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바울의 지상(至上) 목표이자 생애의 기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생애의 끝에 다다를 무렵에도 다음과 같이 확언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3:8).

소발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陰符)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1:7~9). 얼마 후에 욥 자신도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미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26:14).

다윗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5).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그분을 온전치 못하게 알 따름입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11:33,34).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비추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을수 있지만 이 깨달음조차 여전히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때문입니다( 2: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진리를 제공하셨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知覺)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의(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주님께서는 그분을 알고 섬기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이 주셨으므로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다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에 관한 진리를 다 담고 있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한 무한한 계시란, 몇 가지 이유로 해서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첫째로, 유한한 마음은 무한한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간의 마음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또 부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나를 아신 것 같이 충분히 알기란불가능합니다(고전 13:12, 우리말 성경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로 나와 있음-역주). 그러기에 우리는 온전해지는 그 때와 그 경험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지식이나 지혜, 전도나 가르침, 예언이나 해석 따위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조차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살아계신 말씀 앞에 영원토록 있으면서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은 성경의 완성이 아님

그렇다면 장차 오기로 되어 있는 그 온전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을 가리킨다면 예언과 지식은 이미 중지되었을 것이고 그 이래로 모든 신자들은 성경을 전파하고 해석하고 깨닫게 하는 가장 중요한 두 은사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가 계시를 전달하는 데에 사용된 경우는 단지 일부분이었을 뿐이며, 그 밖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이미 계시된 것을 전파하고 해석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지되었다면 교회는 심각한 처지에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아는 바로는 예언이 천년왕국 시대에도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관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7, 2:28). 그 왕국 전()의 환난기 중에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예언의 증인 둘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게하실 것입니다( 11:3).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을 가리키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한 바울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고전 13:12).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놀랍고도 확실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심지여 자기 당시에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벧전 1:8). 성경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주지는 않으며, 신약성경의 완성 이전에도, 이후에도”(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충분히주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전혀 없습니다(고전 13:12). 그런데도 우리는 보지 않은 그분을 사랑합니다.

예언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 중지되었다가 대환난과 천년왕국 중에 다시 재개된다는 말도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 첫째로, 카타르게오(katargeo)라는 동사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폐지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일시적으로 폐지된다는 의미는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와 같은 예언의 잠정적인 중단은 여기에서는 바울의 요지, 곧 은사의 일시성에 비하여 사랑의 영속성을 나타내려는 그의 요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 한 것은 휴거가 아님

많은 강해자들은 온전한 것의 옴(도래)을 교회의 휴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식과 예언이 영원히 폐해졌다면 휴거 후의 대환난 중에나 천년왕국 중에도 더 이상 재개(再開)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은사들이 일단 중지되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은사들은 대환난 때와 천년왕국 때에도 활동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온전한 것은 성숙해진 교회가 아님

비교적 새로운 해석 중의 하나는 온전한 것이 교회의 성숙 또는 완성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이란 단어가 성숙 또는 완성의 의미를 지닐 때도 종종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완성은 결국 휴거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교회와 연관된 주님의 일이 완성되면 그분은 교회를 휴거시키실 터인데 이렇게 되면 대환난과 천년왕국 중의 예언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온전한 것은 재림이 아님

어떤 이들은 온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온전한 것은 헬라어로 텔레이온(teleion)이란 중성(中性)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그 온전한 것이 사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더욱이 위의 견해도 천년왕국 기간 중에 예언이 재등장하고, 말씀이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가르쳐진다는 문제를 역시 안고 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32:3,4 참조). 이 때에 주님께서 세우셔서 자기 백성을 치게 하실 목자들에 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4). 천년왕국 때에도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풍성할 것입니다.

 

온전한 것은 영원의 상태(영원한 나라)

지금까지 여러가지 견해들을 고찰해본 결과, 온전한 것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이 믿는 자들의 영원한 천국상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영적 은사들이 다만 시간이 존재하는 세상을 위 한 것들이지만 사랑은 영원무궁토록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애매모호하지 않고 딘순명료합니다.

영 원의 상태(영 원한 나라)는 온전한 것이 중성으로 표현된 문제도 해결해 주고, 지식과 예언이 교회시대와 대환난 시기, 천년왕국 기간 중에도 계속된다는 문제도 해결해 줍니다. 그것은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문맥과도 들어맞습니다. 그것은 또 우리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라는 언급과 일치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변하는 사건과 더불어 일어나는데 이 때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비췸을 받게 될 것입니다( 21:23). 마침내, 오직 하늘에서만 우리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충분히 알게될 것입니다(고전 13:12).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영원의 상태가 첫째 부활 때에 시작되며, 이 때 그들은 살리심을 받아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12:2).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영원의 상태가 사망시, 곧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때에 시작되거나 혹은 휴거시, 곧 주님이 자기 백성을 데려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때에 시작됩니다. 대환난기와 천년왕국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사망시나 영화롭게 될 때에 시작될 것입니다.

 

은사는 초보적임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충분히 알리라”(고전 13:11,12).

바울은 여기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땅 위에서 생활하는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온전케 될 때의 상태와 견주어 볼 때 어린 아이들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현재(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역주)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소년시절, 즉 어린 아이 적과 비교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유대인 남자는 -미쯔바”(bar mitzvah, “율법의 아들”)가 될 때까지 소년으로 간주되다가 이 -미쯔바가 된 후에는 어른으로 간주됩니다. 한 순간에는 소년이었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어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미쯔바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는 것, 곧 즉각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영적 성인과 장성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모든 유치한 것들이 폐지될 것입니다. 모든 장성치 못한 것, 모든 유치한 것, 모든 불완전한 것, 한계적인 모든 지식과 명철은 영구히 사라질 것입니다.

비록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비추임이 있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 합니다(, 그 당시의 희미한 거울로 보는 것 같다는 뜻임 -역주). 현재의 상태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존전으로 들어가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현재에는 그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지만 그 때에는(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도 충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함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현세의 생활로, 그리스도인의 지상생활로 돌아와서 바울은 영적으로 가장 중대한 세 가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사실, 믿음과 소망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7)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참된 것이 알려지고, 모든 선한 것이 소유되는 하늘에서는 믿음과 소망이 아무런 목적을 가질 수 없는 탓으로 사랑과 동등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이 현세에 있어서도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아름다운 덕목들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에 벌써부터 제일일 뿐만 아니라 사랑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가장 닮았다는 점 때문에도 제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나 소망을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은사, 섬김, 믿음, 소망, 인내, 이모든 것들은 어느 날 그 목적이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보게 될 그 온전한 날에도 사랑은 우리에게 단지 시작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고,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의 생활을 영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며, 다른 어떠한 덕목이나 은사를 소유한 것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와 우리를 묶어주는 끈이 바로 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92 9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