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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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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0. 11:36 횃불/1992년

성령은 있되 열매는 없는 기독인들이여!

허 윤 욱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5).

필자는 길을 가다가 성령폭발 대집회라고 쓴 부흥회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성령이 폭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령이 무슨 폭발물인가!

이 웃지 못할 희극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어도 수많은 양떼들은 영문 모르고 따라가고 그의 지도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신약 성경에서 성령의 본질을 가장적절하고 세밀하게 가르치는 말씀이 요한복음 14:1~16에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본질과 사역의 목적 그리고 사역의 방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말씀하신 성령의 모습은 인격이다. 말하고 듣고 가르치며 신자를 인도하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인격적 성령이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망칙스러운 말이다. 금세기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는 바람 중 하나가 성령운동이다. 소위 오순절운동이라고도 하는 이 운동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은 외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많은 양적 부흥을 가져온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는 이 운동이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대 전략 중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할 수 있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하는 교회들도 상당수가 이러한 물결에 휘말리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이 오순절 운동의 특징은 대부분 신앙의 중심을 외적인 데서 찾는 것이다.

사람들을 이와 같이 기형적 종교인으로 만들어 지옥으로 보내는 데는, 성경에 대해서 까막눈이며 성령에 대해서 오해 가운데 빠져 있는 기독교의 소경지도자들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도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론 구원은 개인적 체험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에 연루된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했다고 매도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다만 이 오순절 주의의 큰 위험은 이와 같은 외적 경험만을 강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원의 증거로 굳게 믿고 실제는 내적인 거듭남의 경험없이 열심히 믿으나 지옥을 향하여 내닫는 무리가 많기로 드리는 말씀이다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무엇인가? 몇 가지만 열거하면 방언, 입신, 신유, 투시등이다. 필자는 20여 년 전에 방언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구원을 경험하기 전이다. 아무런 뜻도 모르고 아무런 유익도 받지 못하고 그저 내 자신도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들을 일정한 규칙도 없이 소리질렀던 것이다. 물론 1시간이나 2시간 기도하고 나면 머리도 밝아지고 기분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신약성경에 방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그것이며 고린도전서 12장과 13,14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요(12:4~), 은사는 필요성에 의해서 존재함을 볼 수 있다. 가령 집을 짓는데 기초를 파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의 노력으로 기초를 파고 현재 집을 짓는 중이라면 이 기술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 2장부터 주님 공중 재림시까지의 모든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본다면 방언이나 예언같은 은사는 기초를 만드는 은사라 할 것이다. 신약교회의 근본 지침이 되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이 은사들이 필요했으나 완성되고 난 이후 성령께서는 이 은사들을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으로 충분히 교회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8~10).

10절의 온전한 것은 말씀임이 분명하다. 성경말씀이 없을 때 구원받은 성도들이 행동지침을 모르고 방황할 때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가 크게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후 성경이 완성되면서 이러한 은사는 소멸되어져 가게 된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어떤 지역에 석유가 나온다고 예언하여 떠들썩했던 경험을 한국교회사는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는 목사님께 예언을 받아보았더니 제주도 해양대학을 가라고 하더라는 것을 들었다.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 기독교가 한국의 기독교를 멍들게 하여 순수한 양떼들을 망하게 하고 있지 아니한가?

신유의 은사도 그렇다. 수많은 신자들이 거듭난 경험도 없이 신유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초대교회의 신유(병고침)들은 성경(신약)이 없는 상황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믿게 했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 신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 곳에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병행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병고침의 역사는 거짓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 16절에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죄인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 주님의 뜻이지 병고치고 건강 축복받는 것이 주님의 오신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두렵고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 저들이 성령으로 행한다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집안 일을 제쳐놓고 날마다 새벽마다 교회당에만 매달리고 며칠씩 기도원에 쫓아다니므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다. 보다 못한 남편의 핍박이 시작되면 주님을 인해서 핍박받는 중이라고 말씀만 자기 식으로 끌어다가 붙이고, 남편에게 대든다고 맞아서 얼굴이 부어터지면 주를 위한 고난의 증거라고 자랑해도 되는가? 오늘날 한국사람들의 사고 속에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가정을 파괴하시는 분이신가? 아담의 아내 하와를 지어 가정을 이루게 하여주신 분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실 때에도 가정을 불러 내지 아니하였던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롯의 가정을 불러내지 아니하였던가? 하나님은 가정을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고 가정을 세우는 분이시다. 예수 믿는 자신의 경건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성령의 열매는 결코 아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어느 집사님은 새벽기도에 나갈 때마다 시어머니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어느 자매가 전해준 복음 테이프를 듣고 구원받은 후 시어머니 앞에서 이 사실을 털어놓고 눈물로 회개하므로 여러 식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 현재 교회의 지체가 되어있는 자매 중 한 분은 늘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받으므로 죽음까지도 생각했으나 어느 날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독교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그 후 7개월 만에 전도자를 만나 구원을 받았다. 이 자매의 변화를 통해 그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이 진정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겠는가? 이혼 직전에 예수님 믿고 새로운 가정으로 변화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대로 진정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곳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 요한복음 3 8절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놀라운 말씀이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바람이 부는 소리와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서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성령으로 거듭남에는 열매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매가 분명치 않은 교인은 그가 아무리 훌륭한 교인이라 하거나 교회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는 거듭난 적이 없는 쭉정이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갈라디아서 5 22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가르치신다.

성령의 첫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어떤 목사의 설교에서 -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물론 부모형제 이웃과 교우 또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나갑시다하는 내용을 들을 적이 있다.

얼른 듣기에 훌륭한 설교라고 생각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말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 자신에게 남을 사랑할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많은 설교자들이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고 있고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사랑을 실천하려 하면 벽에 부딪치고 낙심과 절망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분도 자격도 인격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휘발유 떨어진 자동차가 앞으로 전진하려 애쓰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성령님은 더럽고 죄많은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억지를 쓰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님에 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요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욥기 25 6절에서 인생은 구더기로 비유되고 있다. “부패한 자식이요(이사야 1:4), “가증하고 더러운 자( 14:1~3) 정죄당한 인생이 아닌가!

이 더러운 죄가 용서받기를 기대조차 할 수도 없었던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졌다. 거룩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은 친히 이 죄 많고 고통스런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임을 당하시기를 자원하셨다. 왜 자원하셨는가? 바로 필자 자신을 위함이며 독자들 개인개인을 위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더럽고 추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었던 선하고 의롭다고 하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마가복음 10:18 참조).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떤 찬송가 저자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하나님 사랑에 아직 감복 않은 자야 사람이라 할까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죄인이 깨달았을 때, 그 사랑이 죄인의 심정에 박혔을 때 비로소 죄인의 인격이 변화를 입게 되며 이것을 거듭남의 실체라 할 것이다. 이 거듭남은 신분적 변화이며 신분변화로 말미암아 행위적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갈라디아서 5장의 열매를 보라. 이렇게 사랑을 경험한 신자는 자기 의지적 노력 없이도 희락이 찾아오는 것이다. 죄인이 의인 되었으며 지옥자식이 천국의 소유자로 변하였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자연히 안팎으로 기쁘게 된 것이다.

희락 다음으로 화평의 열매가 저절로 온 것이다. 이것은 의심이나 불안 요소가 사라진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에게 오는 당연한 결과다. 이제는 의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천국의 소망이 마음에 꽉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화평이 올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이제 화평의 소망 후에 오래 참음이 온다. 세상에 소망없는 사람들을 보라. 얼마나 신경질적인가? 시험에 떨어지거나 사업에 망한 사람들을 상상해보면 알리라. 그들은 소망으로 말미암은 화평이 없으니 오래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본래 성격이 훌륭해서 오래 참는 것과 성령의 열매로 참는 것과는 다르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십자가를 통한 열매이니만큼 주님을 묵상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내 속에 있으므로 열매를 맺히는 것이다(베드로전서 2:10 참조). 십자가를 통한 열매가 아니면 성령의 열매 아니다. 결코 아니다.

실예로 바울을 보라. 바울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매사에 적극적이고 강력한 추진력 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는 당당한 모습이 이를 설명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이나 서신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바울이 그런 성격이라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

이것이 바울 자신의 고백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그분께 드렸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리스도 때문에 죽고 그분 때문에 고생하고 그분의 사랑 못잊어 눈물지었던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진면목이다. 이후 오래 참음 뒤에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당연하지 않는가? 주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비하고 양선하며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에게 충성하고자 하며 온유, 절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절제는 마지막에 기록된 열매로 쉬워 보여도 가장 어려운 열매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세상욕심과 죄악과 정욕을 절제하고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 앞에 굴복함이 말처럼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5 24절에 나오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기억하며 사단에게 속지 말고 절제하여야 할 것이다.

, 독자여 !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대의 신앙의 본질이 자신의 노력과 수양과 결심으로 말미암았는가? 아니면 순수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열매인가? 이것은 그대의 신앙을 저울질 해볼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이다.

감나무가 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결심하고 몸부림쳐서 감이 열리는가? 자연스럽게 감을 열지 아니하는가? 왜 그런가? 그것은 감나무이기에 감이 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이다. 노력의 결실, 결심의 결실, 새벽마다 교회당에서 통곡하는 눈물의 결실, 회개하므로 맺는 열매는 육신을 통한 열매지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자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거듭남을 경험하기 위하여 기도하기 바란다. 그러면 그대가 십자가로 변화 받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적혀 불(지옥)에 던지우느니라

두려운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시라!

 

(1992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